이에 수원시는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삼고 적극적인 수원화성 발전방안 마련과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2017년에도 이어진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지 20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연이어 맞이하는 ‘겹경사’이다.
그러나 수원화성이 처음부터 이렇게 ‘꽃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220년 동안 숱한 고초와 위기를 겪어 왔고, 전쟁의 포화 속에 무너졌다. 여기에 군사정권의 국방유산 복원 사업의 일원으로 복원이 진행되면서 정조대왕의 효심 등 수원화성이 가진 ‘핵심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이처럼 갖은 고초를 겪은 수원화성은 이제 새로운 날갯짓을 하고 있다. 특히나 더 큰 의미는 ‘천년 경기’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기술의 정수가 집약됐고,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이 함께한다. 요즘 말로 치면 ‘문ㆍ이과 통합’을 실현한 것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이러한 수원화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걸어보고 경기천년을 열어갈 새로운 가치를 찾아본다.
■ 도망가서 동문, 부서져서 북문… 홍수ㆍ전쟁에 수난 겪은 수원화성
1796년 수원화성이 축조된 이후 두 번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첫 번째는 홍수다. 1800년대 찾아온 홍수로 인해 시설물들이 상당수 날아갔지만, 헌종 때 이를 복원했다. 이어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 큰 홍수가 짝수해마다 찾아오면서 결국 화홍문, 매향교, 남수문이 파괴됐다.
수원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1930년대 일제에 의해 화홍문은 복원됐으나, 남수문은 끝끝내 복원되지 않았다. 이 남수문은 100여 년이 지난 2012년에 와서야 복원됐다.
두 번째는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포격으로 인해 성곽과 축조물들 상당수가 무너져 버렸다. 전쟁 이후 수원화성과 관련,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있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장안문과 창룡문의 피해가 가장 컸다. 누각이 완전히 파괴됐고, 성문의 몸이라 볼 수 있는 ‘육축’(문루를 떠받치는 기반시설) 일부가 부서졌다. 팔달문과 화서문은 다행히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으나, 성곽 전역에서 멀쩡한 누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1970년대 복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20여 채의 누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은 팔달산 정상에 우뚝 솟은 서장대를 비롯한 포루와 동북공심돈, 서남각루 등의 누각이다.
■ 다시 일어선 수원화성…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날개를 달다
수원화성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4공화국 시기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후반기 ‘호국문화유적 복원사업’을 통해서다.
당시 4년 동안 복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장안문~팔달문(1975년), 화홍문~창룡문(1976년), 장안문~화홍문(1977년), 창룡문~동남각루(1978년) 구간이 차례로 복원됐다. ‘수원성복원정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수원화성 복원 사업의 흔적은 현재 장안공원에 있는 수원성복원정화 기념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복원은 정조대왕의 효심 등 역사를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보다는 국방유적을 복원함으로써 국민 단결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반쪽짜리 복원에 그쳤다는 점에 아쉬움을 남겼다.
이러한 아쉬움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해결될 기미를 보인다. 세계기구인 유네스코 차원에서 관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2005~2007년 진행된 장안문 여장 잇기 등을 통해 현재 수원화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 성곽의 복원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사업을 통해 시민들이 장안문의 옹성과 문루, 북성적대 사이의 구간을 관람하고 통행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지난 2012년에 복원된 남수문은 그 정점을 찍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홍수로 붕괴된 이후 흔적조차 볼 수 없었던 남수문이 90년 만에 제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이로써 화홍문과 함께 수원천을 가르는 2개의 수문이 완성됐다.
■ 정조의 ‘애민정신’ 바탕으로…미래로 나가는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이제 미래를 준비한다. 완공 220년을 맞아 진행된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비롯해 수원화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들의 의지 속에 예전의 영광된 모습을 찾고 있다.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4대 저수지 중 축만제(서호)가 세계관계시설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자긍심을 더하고 있다. 장안동에 조성되고 있는 한옥마을, 옛 신풍초등학교 부지에서 진행되는 화성행궁의 완벽한 복원을 위한 발굴 등으로 향후 수원화성은 더욱 큰 역사적ㆍ문화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과 ‘효심’이다. 민초들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없었다면 수원화성은 존재하지 못했다. 수많은 인고의 세월과 고통을 이겨낸 수원화성과 정조를 닮은 수원시민들의 마음은 새로운 경기도의 천년을 열어가는 초석이 될 것이다.
이관주기자
“전통문화 기초한 콘텐츠 차별화 대한민국 대표적 관광지 만들 것”
지난 1997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수원화성은 외ㆍ내형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 변화상을 직접 지켜보며 수원화성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는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을 만났다. 한 관장은 “수원화성의 미래는 결국 콘텐츠”라며 “차별화되고 고급화된 전통문화에 기초한 새로운 수원화성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 선정 20년을 맞는다. 그 의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화성은 복원과 관리 등에서 질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수원화성을 관리하는 화성사업소로 조직이 개편되고 전문인력이 대거 충원됐다. 분야별 전담부서가 생겼고, 상시 모니터링이 이뤄지고 있다. 중장기적인 보존방안이 마련돼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는 점도 세계유산 지정 이후에 가능해졌다. 박물관에서도 이와 관련, 가을에 특별기획전을 준비할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수원화성은 어떻나.
중국의 평요고성(한나라 시기의 고대도시) 등 다른 국가의 세계문화유산을 보면 단순히 유적지 하나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주민들의 집, 생활방식, 문화 등이 전통방식으로 보존돼 있다. 단순히 성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모습, 골목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수원화성은 성곽만 남아있다. 토박이는 나가고 독거노인이나 외국인, 외지인들만 유입돼 동네에 대한 자부심도 떨어진다. 영ㆍ정조시대를 조선후기 문예부흥기, 문화의 정수라 부른다. 이를 향유하고 참여하게끔 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해볼만 한 구체적인 콘텐츠는 없나.
예를 들어 수원화성 안에 섹터를 분리해 한 구역 정도를 기와나 초가집으로 꾸민다. 이곳에는 석공, 주물, 유기, 대목장 등 전통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분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곳에서 생산한 물건은 공방거리를 통해 판매한다. 전통과 현대가 결부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수원화성이 축조 220년을 넘겼다. 앞으로의 200년, 2천년을 바라본다면.
이제는 단순히 세계유산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차별화, 고급화, 전통문화에 기초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호흡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토도 조성돼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하면 대표적인 관광지로 ‘수원화성’이 떠오를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결국 답은 콘텐츠다.
이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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