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칼럼] 인간의 고결함과 생명경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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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교에 입학한 후 의학 교육의 진수를 경험하게 하고 미래에 의사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을 처음 느끼게 된다는 해부학 실습 첫 시간,

 

조교 선생님의 지시로 포르말린으로 처리되어 비닐에 덮힌 시신 12구가 해부학 실습실로 옮겨졌다. 시신을 직접 다루는 해부학 실습에 대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수다를 떨며 모여있던 학생들 모두가 시신을 처음 보는 순간 이내 충격에 휩싸였고 일부 여학생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곧이어 실습실로 들어오신 우리나라 해부학의 최고 권위자 권흥식 교수님은 칠판에 하얀 분필로 ‘생자필사 (生者必死) 사자필생 (死者必生)’을 적으시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여기에 죽어서 누워 계신 이 분들은 여러분의 해부학 지식으로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며 강의를 이어가셨다. 교수님의 추상과 같은 냉철함에 실습실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학생들은 시신 해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본과 3학년 내과학 강의 시간, 강의 시작전 병원 내과의 전공의 1년차 주치의 선배가 급히 강의실로 들어와 ‘여기 학생들 중 A형 혈액형을 가진 학생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신다. 이내 약 20명 정도의 학생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받아 가신 후, 두 달 넘게 A형 혈액형인 의대생들은 병원으로 호출되어 헌혈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수이식을 받는 급성림프구성백혈병 환자를 살리기 위한 혈소판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이후 이 환자의 이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동종골수이식 성공이라는 우리나라 의학사에 새로운 기록을 만들게 되었다.

 

백혈병을 연구하는 교수로서 어느 덧 2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아 오면서 젊은 교수 시절 죽어가는 수 많은 환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흘렸던 눈물도 점점 메말라 백혈병 환자의 치료, 삶,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무덤덤한 일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얼마 전, 모든 치료에도 불응하여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한 환자가 ‘교수님, 제가 죽은 후에 시신을 기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가족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엄마의 임종을 준비한 것 같았다. 

남편과 어린 두 딸과의 이별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시신을 의학 발전을 위해 쓰일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을까?

불현듯 해부학 실습 첫 시간의 교수님 말씀과 환자의 치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전공의 선배의 모습이 다시 떠 올랐다. 

처음 의사가 되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칠 때 모든 환자 생명에 대한 외경을 실천해야겠다는 열정적인 각오가 시간이 흐르면서 똑 같은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서서히 무뎌져 너무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백혈병 발병 후 삶의 많은 부분이 뒤틀어져 가족과 환자 모두 힘든 투병 생활을 해 오면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의연하게 말할 수 있는 모습은 우리가 고결한 인격을 갖춘 인간이기 때문 일 것이다.

 

권 교수님이 후학들에게 남긴 교훈, 한 명의 환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병원 밖으로 뛰어 나와 도움을 요청하던 선배, 그리고 임종을 앞둔 우리 환자의 마지막 소원은 지금 나에게 인간 생명에 대한 완벽한 경외와 끊임없는 연구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촌철 같은 교훈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수많은 의혹, 갈등, 정도를 걷는 것에 대한 회의, 그리고 수많은 비정상적인 상황들….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 라는 말이 간단해 보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만큼 중요한 교훈은 없을 것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결함을 끄집어 낸다면 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 놓고 열정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배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정도를 걷고 기본에 충실하며 주위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말이다.

 

김동욱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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