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그는 왜 냉동화물차에서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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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사를 지낸 어느 정치인이 오래전 한 사건에 연루되어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그가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 하루는 제비가 구치소 창틀에 열심히 집을 짓는 것이 아닌가. 그는 매일 제비들이 집을 짓는 모습에서 위안과 희망을 찾았고 얼마 후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투옥생활에서 책을 읽으며 화초를 가꾸는 것으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희망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는 더 없는 위로요, 에너지다. 그래서 가장 불행한 것은 희망을 잃는 것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 미국 한 시골역에 정차중이던 냉동 화물차에서 시즈맨이라고 하는 역무원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동료들이 작업을 마치고 차량 안에 시즈맨이 잔업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문을 잠그고 퇴근해버려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경찰 조사에서 냉동열차의 온도는 전신이 끊겨 춥지도 않았음이 밝혀졌고 물론 죽음에 이를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이것이 당시 미국 언론과 사회에 큰 충격이었는데 그 대답은 ‘희망’을 잃은 ‘공포’로 결론지었다. ‘동료들은 다 사라졌고 이제 나는 혼자다. 이 화물차는 냉동칸이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이렇게 그는 절망에 빠졌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생명의 에너지를 앗아가고 말았다.

 

물론 인간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무서운 가능성과 폭발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지난 여름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펜싱의 박상영 선수다. 그는 패전 직전에 ‘나는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다짐하며 결국 역전에 성공,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 후 ‘할 수 있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고 살아가기 힘들어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모처럼 IMF 때의 박세리처럼 희망을 주었는데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혼란 속에 빠지면서 이 구호도 가라앉고 말았다.

 

이렇듯 정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할 때 나라의 분위기는 어두워진다.

2017년 새해맞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어느 곳이나 인산인해를 이루었음은 그렇게 ‘희망의 빛’을 바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 것이다. 나도 세종시 인근 산으로 해맞이를 갖는데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우리는 소원을 빌었고 ‘대한민국 만세!’로 끝마무리를 했다.

 

얼마나 착한 국민인가. 그 대열 속에는 불경기로 폐업의 기로에 있는 자영업자도 있고, 이력서를 수십통 만들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취업준비생, 늙었어도 가족들 생계 때문에 핸들을 놓지 못하는 택시기사 등등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목마르게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극심한 정치 불신과 냉소, 심각한 경제난, 핵폭탄을 휘두르며 갱 두목처럼 위협하는 북한 김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미 트럼프 정부, 학생 수가 줄어들어 많은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는 ‘인구 절벽’, 3천만 마리가 넘는 닭·오리 매몰 처분에도 멈출 줄 모르는 AI(고병원성 조류독감), 계속 험난한 수출시장, 갈수록 열악한 비정규직 차별….

 

마치 소크라테스가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의 그리스 혼란 상황을 말하는 아포니아(Aponia)를 떠올리게 한다. 배가 좌초되어 앞으로도 뒤로도 꼼짝 못하고 움직이질 못하는 것을 뜻하는 아포니아-그것이 우리 대한민국을 엄습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우리 정치인들이여. 제발 국회의사당을 싸움터와 비효율의 담론장으로 만들지 말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십시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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