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문화예술로… 안산의 슬픔 소통하고 공감
쉽사리 치유하기 어려운 이 고통을 문화예술로 공감하며 천천히 조금씩 나눠 갖는 공연단이 있다. 안산시에 있는 대학 출신들로 창단해 지난 10년 이상 길 위에서의 공연을 마다하지 않은 극단 ‘걸판’이다. 신나면서도 예리한 사회비판 의식이 돋보이는 작품 창작과 공연으로 집중받고 있는 공연단이다.
안산의 청소년부터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로 구성된 극단까지, 지역사회를 보듬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 같은 활동 끝에 지역의 대표 극단으로 성장한 걸판은 지난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의 상주단체로 좀 더 안정적인 활동 기반을 다졌다. “안산에는 ‘명랑함’이 필요”하다는 극단 걸판이 지역사회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을 지 주목된다.
극단 걸판은 지난 2005년 안산에 있는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풍물패 동문 5명이 창단한 공연단이다. 광고홍보학과와 정치외교학과 등 비전공자들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마당극의 매력에 빠졌고 졸업과 동시에 ‘먹고 살 직업’으로 극단을 창단했다.
안산의 노동자를 위한 문화공간에서 작품 창작과 연습을 하면서 짬짬이 수강생인 시민들과 함께 풍물을 즐겼다. 이 때 ‘당신 살기도 바쁜 노동자’들이 “왜 배고픈 길을 가려고 하냐”면서 밥과 술을 사줬다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극단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안산의 근로자분들 덕분이었어요. 저희가 계속 안산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겠다고 생각하는 이유 역시 그 때 그분들 때문이죠. 지역에서 받았던 소중한 마음들을 되돌려주고 싶어요.”
돈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 년에 3~4개 창작극을 제작, 무대를 가리지 않고 공연했다. 초기 5년간 시의성 있는 단막극을 만들고 문화제나 집회 현장에서 소외된 이웃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10년 이상 직접 작곡하고, 희곡 쓰고, 연출하면서 내공을 쌓았다. ‘이것(극단)만 하고 여기(극단)에서 먹고살자’라는 창단 기조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소액이지만 월급제도 시행했고 2009년에는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정식 연습실을 마련했다.
작품은 많아졌고 극단 규모도 날로 커졌다. 현재 대표와 배우를 겸하는 최현미와 한국 연극계가 주목하는 오세혁 연출가 등 창단 멤버를 비롯해 단원은 30명으로 늘었다. 걸판 작업만 벌이는 상근 단원 5명에 비상근 단원 20여 명, 작품별 계약직 단원 등을 포함한다.
이들이 쉼없이 만든 다양한 주제의 무기들은 제때 쓰였다. 통일을 주제로 한 작품은 청소년 대상 통일 캠프 주최 측의 요청으로 지난해에만 50회가량 상연했다. 번듯한 공연장이 아니어도 이야기를 들어줄 관객이 있는 전국 곳곳에서 공연하고, 해외 무대에도 섰다.
2011년에는 극단 상임작가인 오세혁 연출가의 희곡 2편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2013년 안산에 사는 파견 노동자를 인터뷰한 연극, 2014년 안산에 사는 4~50대 여성의 경험담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하는 작품, 2015년 시각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까지, 극단의 활동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졌다.
하지만 ‘우리 극장’이 없는 것에 목말랐다. 공연장을 빌리는 비용도 부담인데다, 원하는 시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없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다. 이에 안산시를 벗어난 지역의 소극장 위탁 운영도 검토했다. 그러나 창단 초기 선물 같았던 시민들의 마음과 작품 창작과 공연에 집중한다는 창단 기조가 발목을 잡았다.
“안산시에 계속 있고 싶었어요. 몇 년 전에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을 알게 됐죠. 극장이랑 한 해의 공연 계획을 짜고 시민 대상 공공 프로그램도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지난 2016년 그 꿈이 이뤄졌다. 안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된 것이다. 안산문화재단은 지역에서 출발해 지역 기반 활동을 꾸준히 벌여 온 ‘걸판’이 도약하는 디딤판을 자처했다. 지난해 먼저 청소년 대상 기획공연을 제안하는 등 연습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 기회와 무대를 제공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극단의 성장과정이 지역사회 문화예술교육계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 혹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상주단체가 되기 전에는 늘 ‘다음달에 공연 없으면 어떡하지’ 고민했어요. 상주단체가 된 이후 공연장과 함께 연간 계획을 세우고 그 이후까지 구상할 수 있게 됐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작품에 대해 파트너인 기관이 조언도 하고 기획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고민해 만들어 주고, 정말 좋죠. 몇 년 정도 긴 호흡으로 이런 작업을 이어가면 좋겠어요.”
상주 연습실을 제공받으면서 월세 부담이 없어졌고 공연장 대관 비용이 무료인데다 장비까지 지원받으니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재단이 구축해 놓은 회원 관리 프로그램과 소식지 등을 통해 극단이나 작품 등에 대해 효과적인 홍보도 가능해졌다. 여러모로 ‘우리끼리’ 할 때보다 안정적인 상태가 됐다.
극단 걸판은 올해 다시 한 번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되면 신작과 재공연, 기획공연은 물론 지역의 어린이 음악극단을 창단하고 걸판 배우들과 함께하는 작품 제작에 집중할 계획이다. 재단의 지원으로 지역사회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진 만큼 청소년과 중년 등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상연할 수 있도록 기존작품에 대한 보완 및 재상연에도 공을 들일 방침이다.
재단과 걸판이 함께 키워가는 “명랑함”을 기대한다.
류설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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