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민족교육에 젊음을 바치다
일찍부터 신(新)문학을 접해 서울 보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군 주사에 임명됐다. 1910년 8월 국권 피탈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보성 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보성 전문학교 남형우 교수의 권유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단체인 대동 청년단에 가입했다. 대동 청년단은 1909년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 청년 단체다.
1916년에 졸업한 후 청성학교(현 송우초등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20년 귀국 후 민족 교육을 재개하여 강화학원, 경상북도 김천시 광명학교, 경상남도 밀양시 정진학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창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계속했다. 1928년에 민족 자본 형성을 위해 농민을 위한 소비조합을 창립했으나 2년 만에 일제에 의해 해체됐다.
해방 후 한국 독립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영양군수·병산 중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포천시에 화산고등학교(현 경북중학교)를 설립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악정(惡政)을 규탄, 한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포천문화대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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