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판소리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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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 임금이 1800년 6월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써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정조 임금의 개혁을 설계한 동반자가 정약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금의 죽음이 단순한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정약용은 혼란에 빠진다.

 

‘정조 독살설’은 그 당시 민심을 흉흉하게 할 만큼 심각하게 번져 나갔다. 정조 임금이 앓고 있던 종기(등창)에 대한 처방을 내렸던 인물이 정조와 대립관계에 있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 심의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은 중독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연훈방’이라는 처방을 내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임종 자리에 출입이 제한된 정순왕후 단 한 사람뿐이고 사관이나 승지마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의혹을 더욱 키웠다. 정순왕후는 잘 알려진 대로 정조와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정조의 죽음은 독살 음모설 속에 세도정치만 강화시키는 ‘역사의 반동’을 가져왔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물 건너가고, 그를 뒷받침하던 이가환, 정약용 등에게는 정치적 박해가 시작됐으며 천주교 역시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렇듯 ‘역사의 반동’을 보면서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이 또한 깊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서 따온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넌다는 뜻이고, ‘유’는 주변이 무서워 두리번거리며 살핀다는 뜻. 겨울 냇물은 얼음이 얼어 자칫하면 미끄러져 넘어지게 되거나 얼음이 두껍지 않으면 차가운 물에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주위는 온통 당쟁에 눈이 멀어 모함과 모략이 횡행하고 조금만 잘못 보이면 천주교에 연관 지어 끌려가는 세상-겨울 얼어붙은 냇물을 조심스럽게 건너는 것은 물론 주위도 살펴야 하는 세상, 그래서 정약용의 ‘여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속에는 그의 굽힘 없는 가르침이 있다. 그의 아들들에게도 내린 가르침이지만 “문벌과 당파를 척결하라”는 것.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다산’ 보다 ‘여유당’에 더 인간적 공감을 느낀다.

 

그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여유당의 실학박물관에서 지난주 ‘판소리 다산 정약용’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장소인 여유당 바로 뒤에는 정약용의 묘소가 있고 또 봄기운에 푸른빛을 더하고 있는 남한강 물줄기와 마주하고 있어 다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특히 목민심서가 빛을 본 지 200주년이 되는 해여서 판소리 이상의 깊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정약용 인물 자체가 우리나라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 인물인데다, 판소리 또한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어서 이날의 의미를 증폭시켰다 하겠다.

 

이 작품은 ‘창작 판소리 열두바탕 추진위원회’가 지난해,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어서 지방의 역량으로도 이와 같은 수준 높고 의미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재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이날의 송재영 명창(전주대사습 대통령상 수상), 이재영 명창(보성 소리축제 대통령상) 등 쟁쟁한 국악인들의 출연은 공연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에 젖어드는 것은 ‘목민심서’의 정신, 그것에 대한 절절한 아쉬움이다. 이렇게 느끼는 아쉬움은 정약용이 ‘다산’에 ‘여유당’이라는 호를 더했던 상황과 오늘의 정치 현실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18년이라는 긴 세월,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사무쳤던 추악한 당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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