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제(蔭敍制)는 고려ㆍ조선시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양반의 자손을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다. 과거시험도 치르지 않는 일종의 특별 채용이다. 이는 지배층인 귀족 계급이 세습되면서 특권계층의 가문과 지위를 계승하는 토대가 됐다.
이 악습이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의 단체협약에 ‘고용세습’ 조항이 여전히 남아있다. ‘장기근속자 가족 우선 채용’ ‘동일 조건이면 노동조합 추천자 채용’ 식으로 특별 채용규정이 단체협약에 담겨 있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큰 회사일수록 ‘특혜 채용규정’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기아자동차는 단체협약에 정년퇴직자나 장기근속자(25년 이상) 자녀를 우선 채용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현대자동차도 단협에 정년퇴직자 및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직계자녀 1명에 한해 동일한 조건에선 우선 채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공정한 취업 기회가 박탈되고 노동시장 내 격차 확대와 고용구조 악화가 초래된다”며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측은 걸핏하면 파업을 무기로 내세우는 강성노조의 눈치만 보고 있다.
‘현대판 음서제’로 불리는 고용세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업장(상용근로자 100명 이상)은 지난 1월 말 현재 334곳이나 된다. 고용노동부가 2015년 단체협약 전수조사에서 적발한 사업장 694곳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절반 가까이가 ‘우선ㆍ특별 채용’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롯데백화점, 대우조선해양, 쌍용자동차 등 상당수 대기업이 포함됐다.
시정은커녕 일부 노동조합은 ‘채용장사’를 하다가 적발됐다. 이는 ‘노조 추천 지원자들은 무조건 합격한다’는 관행 때문으로 노조가 단체협약을 근거로 채용 과정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비리에 휘말리고 있다. 지난달 인천지방검찰청은 돈을 받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한 한국GM 임원과 전·현직 노조 간부들을 기소한 바 있다.
기득권 노조의 고용세습은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좌절감을 갖게 한다. 공정하게 경쟁해서 취업하려는 입장에서 보면 이들이야말로 금수저다.
고용세습은 고용부가 시정명령을 내린 뒤 개선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솜방망이 처벌로는 불공정하고 비윤리적인 악습을 뿌리 뽑을 수 없다. 고용세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노조법 개정이 시급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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