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때로 심부의 형상을 드러낼 때가 있지요. 2003년부터 바깥미술회에 참여해 온 김용민 작가의 작품 중 ‘가시나무새’는 아마도 그런 작품이라 생각해요. 그는 2012년 자라섬 국제바깥미술전에 ‘초대’라는 작품을 제작, 발표한 적이 있어요.
자라섬의 수변부에 설치한 ‘초대’는 가지치기로 잘라 낸 가지들로 만든 문이었어요. 가지들을 방사형으로 엮되 납작한 벽체를 세우듯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도록 했고, 그 중앙에 문을 뚫었죠. 제법 두꺼운 나무를 반으로 갈라 문틀을 세웠던 거예요.
문틀이 본래 하나의 나무이니 문을 닫으면 나뭇가지의 벽이에요. 다만, 문틀의 바깥과 달리 문의 안은 큰 가지들로 채워서 풍경의 부분을 이루도록 했죠. 문만 떼어서 보면 큰 나뭇가지의 한 부분과 다르지 않아요. 아름다운 나뭇가지의 창살이요 문 인거죠.
그는 문을 열어서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나들도록 했어요. 섬에서 이쪽과 저쪽은 그저 말뿐이에요. 문의 경계를 넘는다고 달라지는 법은 없으니까요. 저기나 여기나 섬의 일부일 따름.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닐 뿐인 인식의 경계를 슬쩍 농치며 파고들어요.
자라섬 현장에서 작가나 관객들은 하나같이 그 문을 통과하며 풍경을 이어갔어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면서 경계는 뚜렷하게 각인되었고, 각인된 경계는 지워지지 않더군요. 그 경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문이 하나의 열쇠. 가지들의 중앙에 사각의 빈 공간만 두어도 문일 텐데 그는 굳이 문을 달았잖아요. 닫히고 열리는 문을 달아서 경계의 인식을 결론지었고요. 문을 닫으면 누구도 그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결론. 그러므로 ‘초대’는 문이 열리면서 시작될 수밖에 없죠.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래야만 문의 바깥을 밟을 수 있어요. 경계가 바로 문인 셈예요. 그리고 그 문은 자연의 심부일 거예요. 숲으로 가는 통로. 우리는 그 통로를 통해서만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는 그런 심부의 형상에 덧대어 ‘가시나무새’를 완성했죠. ‘가시나무새’의 틀도 하나의 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이어 붙였거든요. 바깥이 안을 이룬 이 작품은 안팎의 경계가 없어요. 경계 없는 바로 그것이 또 자연의 심부.
가시나무새는 자연의 심부에서 죽었어요. 가시나무는 두 손으로 새를 감싸고 있지요. 밖이 안이 되고 안의 두 손이 새를 감싸는 기이한 순환의 원리가 어쩌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의 거대한 이치라는 생각.
이 작품은 사각형의 틀거리로 시각화 되었으나 나뭇가지들의 생장은 사방이 없어요. 그렇다면 새의 주검은 이 순간 새 생명의 잉태와 이어지고 있는 순간임에 틀림없어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