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으로 너무나 유명한 마키아벨리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그의 운명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건 1494년 11월 프랑스의 침공이었다. 샤를 8세 국왕이 직접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점거당한 피렌체는 프랑스의 수탈에 신음했다. 그러나 어느 기존 정치권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있던 사보나롤라 수사는 샤를 8세 프랑스 국왕을 면담했는데 그 감동적인 언변에 설득된 왕은 기꺼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피렌체에 대한 수탈도 중지시켰다. 이렇게 되자 하루아침에 군중의 영웅이 된 사보나롤라는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갔다.
그는 수사였지만 ‘개혁’을 권력의 정당성으로 내세우고 교황청에 대해서까지 강한 비판을 가했다. 또 메디치 가문이 장악했던 당시 피렌체 기득권의 부패를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시민들에게도 ‘눈물’로 상징되는 참회를 통한 기독교적 공동선, 그에 기초한 도덕적 개혁을 추구했다.
1494년부터 4년간 계속된 그의 집권 초기에 이와 같은 새로운 ‘공화 정부’, ‘시민 정부’는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언변으로도 안되는 것이 있었다. 그 무렵의 심각한 경제난과 전염병.
수사복을 입고 도덕성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아마추어 정치인, 그 포퓰리즘으로써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항소권마저 주지 않고 5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내려 시민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시민 정부’를 주장한 그가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이율배반-훗날 마키아벨리는 여기에서 누구나 권력을 잡으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는데도 그를 보호해 줄 친위세력은 없었다. 친위세력이라고 믿었던 군중은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또한 쉽게 분노하며 변덕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더욱 사보나롤라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교황청에 맞서 사보나롤라를 옹호하던 피렌체 시민들이 마침내 사보나롤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 이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이 대중이라는 사실도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마침내 사보나롤라는 한 성직자에서 영웅이 되고, 대중의 열렬한 지지 속에 권력까지 잡았다가 1498년 5월 23일, 그를 지지했던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에게 매우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는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하며, 무장한 예언자는 승리한다’고 생각했다. 즉 성공적인 권력 유지에는 자기의 무장된 친위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울보에게도, 분노한 자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는 권력 유지에는 실패했으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롯 르네상스에 불을 밝히는 중요한 역할도 했다. 어쨌든 역사는 늘 반복된다. 그러면서 진화한다.
눈물과 분노가 교차된 광장의 열기, 그 치열했던 탄핵정국이 막을 내리면서 이제 대선정국으로 급속히 바뀌어가고 있다.
과연 누가 권력의 정점에 설 것인가? 여기에서 대선 주자들은 시민의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화형장 연기로 사라진 사보나롤라를 바라보며, 마키아벨리가 한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물론 ‘권력’ 역시 “울보에게도 분노한 자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는 것.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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