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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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이야기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근사한 세상이 있을 것 같아 누군가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면 귀가 솔깃하던 때였다. 동기생 하나가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그것은 ‘벽’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동안 친구의 말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바로 그 미술 선생님이 내가 다니던 대학에 출강하였다. 어느 날 저녁 그분과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술이 좀 오를 무렵 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벽’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대답 대신 나를 때리려 했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말렸다.

 

얼마 전 나는 그 ‘벽’이란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마음의 벽’ ‘현실의 벽’ ‘마의 벽’처럼 벽이라는 글자 앞에 무슨 말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해지지만 주로 단절과 한계 상황을 표현한다. 요즈음 내가 생각하는 ‘벽’은 예술가의 딜레마에 관한 것이다.

 

진지한 예술가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견고한 벽을 느끼고 그 벽 너머 새로운 세계를 보고자 한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무엇에 반응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는지 보면서 마침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리 가도 앞서는 이가 있고 저리 가도 결국 남의 발자국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주하게 되는 ‘막막함’ 그것이 바로 ‘벽’이다. 어쩌면 작가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그 벽을 느꼈다면 이는 축하받을 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면 그것은 절망이다.

 

이 문제의 벽은 사실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벽에 부딪치다’라는 표현은 벽 너머 세계를 감지한 자만의 한계인식이다. 예술가들의 딜레마는 신세계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가 문 안에 있다는 데 있다. 벽 너머 새로운 세계를 직접 경험해야만 취할 수 있는 이 열쇠는 논리적으로는 획득 불가이다.

 

이 모순 상황의 극복은 외부로부터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을 우리는 ‘영감’이라 부른다. 영감의 빛을 따라 골몰하던 모든 고민의 벽을 무화 시킨 천재들의 이야기는 때로 통쾌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경계 이탈은 묘수이자 악수이다. 생존영역을 벗어나는 수 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영감으로 충만한 시인들을 위험한 광인으로 여겨 도시에서 추방하려고 했지 않은가? 하지만 예술가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작용하는 영감을 따라 이상한 세계로 뛰어든다.

 

최초의 영감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자라고 정직한 반응을 통해 힘을 얻는다. 난공불락의 벽이 허물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전위에 선 예술가들의 상상력은 더욱 살아 움직일 것이며 어느 순간 그들은 영감의 빛을 맞이할 것이다. 반면에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이쯤에서 장마당을 펼치자’라는 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다면 우리를 가두고 있는 벽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누군가의 작품이 제대로 된 예술인지 아니면 허세로운 예술 놀음에 불과한지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갈 곳 없는 한계의 벽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의 행동거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들 중에 지금까지 전혀 작동하지 않던 감각을 깨워 우리 사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예술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를 항해 중인 우주인과 같다. 지구에 아무리 급한 이변이 발생해도 그들의 항로는 수정될 수 없다. 귀환 명령을 내리지 말지니 이들과 우리는 미래의 땅에서 만날 것이다. 그 땅은 넓어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더 이상 옛 땅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전원길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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