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운동 전개… 목숨 건 구국의 실천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했다.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자 왕의 친정(親政)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체포돼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됐다 석방됐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됐고, 석방된 후에는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ㆍ일본군과 싸웠으나 패전, 체포돼 대마도에 유배됐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하다가 굶어죽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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