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은 그의 어머니 육영수여사가 좋아했던 꽃이다. 그래서 비명에 간 그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이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더욱 너나 없는 비극적 가족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양자로 들어온 이강석은 4ㆍ19때 권총으로 생부모를 사살하고 자신도 죽었다. 경무대(청와대)를 나온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고,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들은 아들들의 부정부패로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의 형님 때문에 곤욕을 겪어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고향에서 목숨을 끊었다.
왜 이렇게 청와대만 들어가면 모두 ‘불행한 대통령’으로 전락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청와대의 터가 그렇다고도 하고, 제왕적 대통령제의 헌법을 탓하기도 한다.
사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는 과정이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원래 조선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장소에 일제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 의해 1937년 착공, 1939년에 관저로 지어졌다.
육군 대장 출신의 미나미 총독이 굳이 이 곳을 관저로 택한 것은 조선 왕기(王氣)를 누르려는 저의 때문이라고 하는데, 역대 총독 중 가장 악명 높던 행적을 봐도 그럴법한 이야기다. 특히 그는 우리 국어 말살정책을 추진했고,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를 정간시켰으며 우리 동포의 간도 이주를 강압적으로 추진했던 것.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곳이 좋은 이미지는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자 총독 관저는 사령관 하지 중장의 관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과 함께 관저로 사용했으며 4.19 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은 이미지를 새롭게 하려고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경복궁의 현 위치가 정혈 자리라면 청와대는 동향으로 지었어야 탈이 없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은 계속 되었다.
한편 이와는 다른 시각도 있다. ‘다시 쓰는 한국 풍수’의 저자 이몽일씨는 새로 개축하여 1991년 완공을 본 현 청와대가 겉보기에는 북악산 지세에 잘 조화되고 기상과 위엄이 있다고 하지만, 집무실 접근이 극히 어렵게 공간이 이루어져 왕의 궁전 같은 감을 준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백악관처럼 ‘일하는 집’으로서의 기능보다 건물 배치와 건물구조의 중압감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분위기를 축적시키고, 그것은 곧 ‘인(人)의 장막’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해석이 나올 법 하다. 그렇게 분위기는 중요한 것이다. 솔직히 나 역시 어쩌다 청와대에 들릴 경우, 그런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도 좋지만 그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적 분위기’에 빠지게 되는 청와대의 구조도 생각해 볼 문제다. 아예 청와대를 옮기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일하는 대통령의 집’으로 설계도 하고….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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