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역사인물] 강세황 (1713∼1791)

조선후기의 주도적 화풍을 정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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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부터 시를 짓고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9세에 정조(正祖) 어진 제작의 감독을 맡았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이른 일을 계기로 강세황이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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