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시는 내가 가르치는 글쓰기반의 N이라는 할머니 수강생이 쓴 글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가방끈이 짧으니 잘 봐 달라고 애교(?)를 떠는 분. 그녀는 글도 나오는 대로 적는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치장하지 않은 이런 글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게다가 맞춤법이며 띄어쓰기조차 제대로 안 된 그녀의 글에서 왠지 진실함을 발견한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그리고 다른 수강생들에게도 이렇게 이른다. “정직하게 쓴 글보다 더 잘 쓴 글은 없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좀 안 되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편집자들이 다 알아서 잡아줍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냥 쓰기만 하세요.”
나는 글과 요리는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은 되도록 양념을 적게 쓴다는 것을 안 뒤부터다. 양념을 적게 써야만 재료의 본래 맛을 제대로 낼 수가 있다고 한다. 곧 소박함을 추구하는 요리법이다. 절간의 음식이 담백한 것은 이 요리법을 구사하기 때문으로 안다. 이에 반해 시중의 음식은 대개 맵고 짜고 달다. 그래야만 손님들의 구미에 맞는단다.
글도 음식과 다를 바가 없다. 느낀 그대로를 적으면 좋은 글인데 자꾸 꾸미려고 든다. 그러다 보니 본래의 맛이 없어진다. 아니 맛뿐이 아니라 무엇을 썼는지 주제까지 흐려 놓는다. 소위 유식해 보이려는 글일수록 이런 종류의 글이 많다. 시(詩)란 것도 그렇다. 왜 그리 비틀고 쥐어짜고 그것도 모자라서 고무줄 늘이듯 해야 하는가. 꼭 그래야만 좋은 시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법정 스님의 글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담고 있는 뜻은 깊고도 그윽하다. 이해인 수녀의 시는 초등학생이 읽어도 좋을 만큼 쉬운 언어로 세상을 노래한다. 그러나 읽을수록 그 맛이 우러난다. 천상병의 시는 더더욱 쉽고 간결하다. 어떤 것은 한글을 갓 깨우친 아이가 쓴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를 읽고 오히려 마음이 즐거워진다.
글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인 것에서 오히려 친근함을 느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이 아닌가 싶다. 만약 산을 인공적으로 깎아 세웠다고 해 보자. 누가 그토록 산을 오르려고 하겠는가. 산의 그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러 우리는 오늘도 등산화를 찾는 것이리라.
‘내가 나무이고/내가 꽃이고/내가 향기인데/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헛것을 따라다니다/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김형영 시인의 <헛것을 따라다니다>란 시의 끝부분이다. 꼭 요즘의 우리들을 꼬집는 것 같다. 그렇다! 되도록이면 있는 대로 살자. 글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 신이 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윤수천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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