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막 태동하던 2001년 겨울, 당시 월드컵을 준비하던 김대중 정부는 그것을 ‘역동성’으로 꼽았다. 이른바 ‘Dynamic Korea’라는 영문 캐치프레이즈가 그것이다.
확실히 오늘날 한국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압축적 근대화를 위해서, 그리고 지금은 세계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 한국인들은 언제나 분주하게 뛰어 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성은 한류드라마나 K-Pop과 같은 대중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을 이토록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경제개발이나 국제정세와 같은 외적인 요인만으로 그 원인이 다 설명될 수 있을까. 사상이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인 요인은 없는 것일까. 교토대학의 오구라키조 교수는 그것을 성리학의 ‘리’에서 찾았다.
여기서 ‘리(理)’란 ‘도덕’이나 ‘이념’의 다른 말로, 한국인은 끊임없이 이 ‘리’를 지향하는 도덕지향성 내지 상승지향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성향이 한국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사람들. 근간). 이것은 ‘리’를 중심으로 본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기’의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서경덕의 ‘화담집’
■ 주리론과 주기론의 도식
‘리’가 원리나 도덕, 또는 보편이나 이념을 나타낸다면, ‘기’는 생성이나 변화, 또는 구체와 현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리가 보편적 이념이라면 기는 구체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는 역동성 그 자체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조선시대에 구체적 현실과 역동적 변화를 강조한 유학의 흐름을 철학사에서는 흔히 ‘주기론’이라고 부른다. ‘주기론’은 ‘주리론’과 대비되는 범주로, 이 틀로 조선유학사를 서술한 것은 일제시대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가 처음이다. 그는 사단칠정논쟁에 나오는 퇴계 이황의 ‘주어리(主於理)’와 ‘주어기(主於氣)’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어, 조선유학사를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이라는 도식으로 정리했다.
여기서 ‘주어리(主於理)’란 “사단이라는 도덕감정은 ‘리’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라는 뜻이고, ‘주어기(主於氣)’는 “칠정이라는 일반감정은 ‘기’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 즉 ‘네 가지 도덕감정’과 ‘일곱 가지 일반감정’은 그 근원이 각각 ‘리’와 ‘기’로서 다르다고 보고, 그것을 “리를 주로 한다”[主於理]와 “기를 주로 한다”[主於氣]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율곡은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기’에 의해 표출된 것으로, 양자의 차이는 단지 조화의 유무에 있다고 보았다. 즉 칠정이 조화를 이룬 것이 사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후에 퇴계학파는 율곡학파를 ‘주기’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주리’라고 주장했다.
다카하시 토오루의 주리론-주기론 도식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즉 인간의 감정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퇴계학파가 임의로 만들어낸 개념 틀을 가져다가 조선유학사 전체를 설명하는 데 적용한 것이다(조남호, 조선의 유학). 그런 점에서는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이유는 이 틀이 전체적인 흐름을 잡는 데에는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그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주기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 서경덕의 ‘기자이(機自爾)’
주기론의 가장 큰 특징은 선험적 ‘이념’보다는 변화하는 ‘현실’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주리론이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 내지는 목적을 하나의 ‘리’로서 설정하고, 모든 존재는 그 단일한 ‘리’에 따라 운행하고 있으며, 그것을 인간사회에 실현시키는 것이야말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주기론은 그런 외적인 원리나 선험적 이념을 따로 설정하지 않고, 우주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최한기의 ‘신기통’
즉 리와 기의 관계로 말하면, ‘기’를 주재하는 ‘리’가 있어서 그 ‘리’가 ‘기’를 존재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 자체에 내적인 동력이 처음부터 구비돼 있어 그 힘으로 만물이 생성되고 운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기론의 효시라고 알려진 화담 서경덕은 “기자이(機自爾)”라는 말로 표현했다. 여기에서 ‘機’(기)는 ‘기계’나 ‘비행기’라고 할 때의 ‘기’로, ‘틀’이나 ‘메커니즘’을 말한다. 그리고 ‘自爾’(자이)는 ‘自然’(자연)의 다른 말로, ‘스스로[自] 그러하다[爾]’는 뜻이다.
그래서 ‘기자이’는 우주는 마치 기계와 같이 그 자체의 원리에 의해 저절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氣)가 지니고 있는 자족성, 무목적성, 역동성을 나타낸 말이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삶의 목적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재설정될 뿐이다. 즉 도달해야 할 불변의 이상이 먼저 있고, 그 이상에 맞춰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이상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리론이 도덕적 원칙과 확고한 이념을 강조한다면, 주기론은 상황에 따른 유연한 변화와 적절한 대응을 강조하게 된다.
■ 율곡의 ‘실심실학’
서경덕이 우주론의 영역에서 주기론을 주장했다고 한다면, 이율곡은 실천론의 차원에서 주기론적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은 한편으로는 서경덕을 “스스로 터득한 바”[自得]가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리와 기의 관계에 있어서는 ‘리기지묘’(理氣之妙), 즉 “리와 기의 묘합”을 주장했다. 이 세계는 리와 기의 조화로운 관계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에 대한 리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주리론과도 다르다는 점에서, 서경덕과 이퇴계의 중간 정도의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때의 ‘리’를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변화의 ‘리’로 파악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부단한 심신수양과 현실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기론적인 경향도 보이고 있다.
하늘에는 실리가 있어서 기화가 쉬지 않고 진행된다
(天有實理, 故氣化流行而不息)
사람에는 실심이 있어서 공부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人有實心, 故工夫緝熙而無間)
여기에서 ‘기화’(氣化)는 ‘기의 변화’라는 뜻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리고 ‘실리’(實理)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우주 자체의 법칙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리’는 흔히 주리론에서 말하는 도덕적 원리나 사단의 근원으로서의 ‘리’와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즉 주리론적인 ‘리’라기보다는 주기론적인 ‘리’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이러한 역동적 우주론을 바탕으로 수양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우주 안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리가 내재되어 있듯이, 그것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도 끊임없이 수양을 할 수 있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율곡은 ‘실심’이라고 명명했다.
율곡 이이
율곡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리의 우주론과 실심의 수양론을 바탕으로 실학의 정치론을 주장했다. 여기서 ‘실학’이란 구체적인 제도 개혁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인 학문이라는 뜻이다. 율곡은 우주가 시간에 따라 변하듯이 제도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데, 조선은 바야흐로 개혁의 시점에 와 있다고 진단하고, 현실적인 학문관을 제시한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론과 현실인식이야말로 주기론적인 사상적 경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의 이러한 주기론적 경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청나라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는 이른바 ‘북학파’ 실학으로 계승되고, 조선 말기에는 오로지 ‘기’만으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설명하는 ‘기학’(氣學) 체계를 완성한 최한기로 이어진다. 이처럼 주기론은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에 맞는 사회 변화를 도모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새로움과 역동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이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유교라는 신분제 사회가 종언을 고한 현대 한국 사회에 들어와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토록 역동성을 띠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인들이 변화와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주기론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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