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12. 도덕적 이상주의를 꿈꾼 조광조

정몽주 도학사상 계승… ‘이상 사회’ 시대를 앞선 개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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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심곡서원(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경기도유형문화재 7호).
퇴계 이황은 정암 조광조가 당시의 임금과 백성을 중국의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군자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기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은 무모한 시도로 인해 기묘사화의 화를 자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정암 조광조는 군자의 뜻은 있었으나 시기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을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퇴계가 진정 정암 조광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소리를 한 것인가. 

조광조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는 그가 급진주의자 혹은 급진개혁주의자라고 하고 있다.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보수 혹은 중도 세력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그가 꿈꾸었던 이상 세계를 실현하지 못하고 몰락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그가 진정 급진개혁주의자인가. 그가 추진했던 것이 백성을 위한 진정한 개혁이었는지, 아니면 사대부들이 꿈꾼 성리학적 질서가 충만한 사회였는지. 

그러나 이런 도발적인 질문도 중요하지만 진정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주의자였고 그가 만들고자 했던 이상사회는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광조는 17세 때 북쪽의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희천에서 유배 중인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했다. 조광조는 천성이 총명할 뿐 아니라 부지런하고 수수해 김굉필의 문하에서 남달리 두각을 나타냈다. 

조광조는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 20세를 전후해서 가장 성실하고 촉망받는 청년학자로 꼽혔다. 이와 같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것이 훗날 조광조를 모은 정몽주의 학통을 잇는 인물로 만들었고 이것으로 인해 중종대 개혁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돼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 됐다.

 

조광조는 사림세력에서 정몽주의 도학을 온전히 계승한 인물로 평가됐다. 조광조의 주도로 중종 12년에 정몽주의 문묘의 배향이 확정됐다. 고려말 조선의 건국을 부정했던 인물이 조정의 가장 중요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성균관 문묘에 배향됐다는 것은 신분의 복권을 넘어서서 그가 조선 성리학의 종조(宗祖)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배향을 주도한 조광조는 정몽주에서 길재로, 길재에서 김숙자로, 김숙자에서 김종직으로, 김종직에서 김굉필로, 김굉필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으로 확립될 수 있었다. 이러한 도통론은 조광조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고, 중종은 조광조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사림 세력의 막강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중종반정으로 조선의 국왕에 오른 중종은 실권이 없는 국왕이었다. 반정의 주체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왕을 이용할 뿐이었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조선 왕실 전체에서 가장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창과 칼을 동원해서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에게 국왕의 귄위를 인정해달라고 소리칠 수 있는 능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은 자신의 지지세력이 필요했고, 정몽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 도통의 맥을 갖고 있는 조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조광조는 당시의 사회를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극악의 시대로 봤다. 훈구세력이라고 불리는 국가의 기득권자들은 처음 조선을 건국할 때와 연산군을 제거하고 중종반정을 추진할 때의 순수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얻는 부패한 권력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무너져 내린 지배층의 도덕성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를 중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스리는 사람들이 유교적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군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광조 영정
조광조 영정
이것이 바로 도덕적 근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도덕의 정치화를 통해 도학과 정치를 일치화 하자는 것이 조광조의 생각이었다. 조광조의 생각대로 하자면 정치관료 모두가 군자가 돼야 하고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했다. 부정과 부패는 도덕의 정치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기득권으로 전락한 훈구세력들에 도덕의 정치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사람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언로를 활발히 열도록 했다. 언로를 막으면 정당한 의견도 막히기 때문에 국가 흥망에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향촌의 상호부조와 민간의 교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는 향촌이 이기주의로 흐르고, 상호부조의 정신과 미풍양속이 해이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씨향약’을 팔도에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셋째, 괴이하고 허황한 신앙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일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격서 혁파였다. 

신라 하대에 유불선(儒佛仙)이 분리된 이후 선교(仙敎)는 민간과 왕실에서 기복신앙 형태로 나타났다. 왕가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소격서는 조광조의 눈에 볼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허황된 신앙이자 이단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해서 이것을 없애버렸다. 

네 번째 현량과 신설이었다. 조선 건국 이해 추진되었던 과거만으로는 도학적 정치인을 선발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는 현인들을 과거 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해 선발할 수 있는 현량과를 설치했던 것이다. 현량과의 설치로 인하여 조광조와 함께 정치할 수 있는 사림세력들이 대거 등장하게 됐고, 이 역시 훈구세력들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들은 중종에게 부담은 될 수 있었지만 도덕정치를 회복하자는 차원이었고, 이를 통해 훈구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는데 조광조가 강력하게 요구했던 반정공신들의 공신록(功臣錄)에서의 삭제는 엄청난 반대에 직면하게 됐다. 물론 중종반정 당시 공로를 세우지 않은 사람들이 대거 공신록에 들어가 실제적인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의 상당수를 공신에서 삭제한다는 것은 중종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반정공신들은 도저히 조광조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 남곤, 심정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게 됐다. 이들은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을 조작해 중종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 땅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조광조 묘역
조광조 묘역
죽음의 시기가 다가옴을 인식한 조광조는 시중들던 사람에게 ‘내가 죽거든 관을 두껍게 쓰지 말고 얇은 송판으로 만들어라. 선산이 있는 용인에 묻히고자 하는데 그곳까지는 길이 멀고 험난하여 운구가 힘들 것이니, 이는 너희들의 힘을 덜고자 함이다.“고 말하고 시 한 편을 남겼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다. 개혁이 실패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후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됐다.

 

조광조는 선조 때에 비로소 신원 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문묘에 배향되고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효종 원년(1650)에 그를 추모하는 유림들에 의해 조광조가 부친을 장례 한 후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던 곳에 서원을 세워 이름을 심곡서원(深谷書院)이라 했다.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뤄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어쩌면 가혹한 평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도학 정치는 바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정치지도자들의 도덕성 회복,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백성을 위한 진정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꿈은 조광조의 생각과 실천이 참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가 대통령선거를 지금 치르는 것이 바로 정치인들의 권력농단과 부정부패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우리는 조광조의 도덕적 근본주의인 도학정치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편한 인생의 유혹을 거부하고 고통스럽지만 나라를 위해 혼신을 다했던 참 위인 조광조가 죽기 직전 마지막 시 한 수를 보여주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愛君如愛夫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고

憂國憂如家 나라 일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고 밝은 햇빛 세상에 비치니

昭昭照丹衷 거짓 없는 내 마음 환히 비추리

김산 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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