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1월 27일 서울의 관훈미술관에서 ‘노원희 작품전’이 열렸어요. 두 번째 개인전이었죠.
1970년대가 저문 지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그해 5월에는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여러 면에서 ‘충격’이었어요.
백색의 단색화가 주류를 형성했던 시대가 1970년대잖아요. 색색의 단색화는 198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뿐 검열과 억압이 심했던 1970년대는 색조차도 함부로 쓸 수 없었어요. 색은 어떤 측면에서는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주 상징적인 소재예요.
백색이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색이죠. 백색을 두고 동양의 색이니, 정신의 색이니 하며 온갖 철학적인 미사여구를 들이대더라도 1970년대의 상황에서 그것은 단순히 ‘드러내지 않음’의 상징일 뿐이에요.
그런데 노원희는 ‘거리에서’, ‘한길’, ‘얼굴’, ‘행렬’ 등 대부분의 출품작에서 불온하기 짝이 없는 색채를 드러냈어요.
미술평론가 김윤수는 전시를 본 후 “분명히 말해서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라며 운을 뗀 뒤, “그림의 모티브는 인간의 삶이고 주제는 사회적 현실이다. 이러한 주제를 때로는 사실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어두운 색조, 형태의 왜곡과 축약 등의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그림은 70년대의 번영과 화려한 구호 밑에 응달진 삶을 살아 온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라고 평가했죠.
1979년 말부터 80년 초까지 그려서 완성한 ‘한길’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 거리의 풍경을 채집하던 그가 대구의 한 골목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그린 것이에요.
사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목격한 현실은 골목이나 한길, 때로는 대로나 들판, 아니면 밀폐된 방과 같은 인간사회가 조성해 놓은 사회적 공간이에요. 거기서 놀고 있는 아이들, 어른들. 그들은 때로는 멍하니 서있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하거나 아주 굳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죠.
화면 밖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아이를 보세요.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을 보세요. 어스름 녘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세요. 서로 서로 놀이에 열중하고 있으나 서로의 서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상한 관계를 보세요.
전시기획자 김지연은 작가가 거리에서 마주한 장면은 작가에게 개인의 사적인 폭력성 차원이 아니라 사회가 품고 있는 거대한 호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말하더군요. 한마디로 그것은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거예요.
내일 광주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기로 했다고 해요.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전쟁놀이가 아닌 희망놀이를 보여줄 때가 된 듯해요.
글_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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