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여승구 기자가 세월호 참사 1127일만에 돌아온 故고창석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불났을 때 가장 먼저 뛰어들고 어려운 친구 외면하면 혼내시던 의협심 강한 멋쟁이 선생님
마지막까지 제자들 탈출돕다 본인도 못 빠져나오셨다니… 그곳에서는 부디 편히 쉬시길
고창석 선생님, 이제 당신 존함 앞에 ‘故’ 자를 붙여야 할까요.
그래야겠죠. 오늘(17일) 세월호 현장수습본부가 지난 5일 오전 11시30분께 침몰 해역에서 수습한 뼛조각 1점이 바로 저의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당신의 것이 맞다고 발표했으니까요.
주변에서는 이리 담담한 저를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미수습자 9명 중 한 명으로 거론됐던 지난 1천100여 일 동안 결코 조의조차 할 수 없었던 제자의 마음을요.
대학교 3학년이었던 지난 2014년, 그 믿을 수 없는 세월호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동명이인이라 생각했습니다. 학교명이 달랐으니까요.
그러나 불안해졌죠. 탈출이 쉬운 세월호 5층 로비 옆 숙소에 머문 체육교사가 4층 객실 곳곳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줬다는 목격담이 보도됐거든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유난히 의협심 강했던 선생님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2005년 제가 부반장이었던 그 해, 선생님은 참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성적 때문은 아니었죠. 깁스한 친구를 부축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밥 못 먹는 아이를 챙기지 않을 때 어김없이 혼내셨습니다. 휴게실에 불이 났을 때 소화기를 들고 가장 먼저 뛰어들어간 사람도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세월호 침몰 1개월 전 단원고 체육 교사로 발령받은 고 교사’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네, 선생님이시라면 그 차가운 바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 구하기가 먼저였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선생님을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선생님이 축구를 가르치며 저희와 함께 뛰던 날, 까맣고 남자다운 그 모습에 반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큰 도시가 아니었던 안산에서 배우기 어려웠던 테니스를 직접 가르쳐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동료 교사였던 사모님과의 결혼 발표에 발을 동동 구른 여학생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세월호 비보를 접한 당시 사모님은 휴직 중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유골로 확인된 오늘, “그 사람은 자상한 남편이었고 최고의 아버지였다”고 회상하는 사모님을 뵀습니다.
스물여덟 청년이 된 저는 경기도 지역 일간지에서 취재기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겠지만, 선생님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건에 선생님과 동네 후배들을 잃으면서 저의 가치관이 바뀌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이제 선생님께 이 지면을 빌어 다짐합니다. 가르쳐주신 그 정의(正義)를 지키며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의 자랑스러운 스승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정말 선생님을 보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곧 친구들과 그동안 차마 가지 못했던 분향소로 찾아뵙겠습니다.
2017년 5월 17일
제자 여승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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