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재덕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 권철신

▲ IMG_8770천진암 터
▲ 천진암 터
천진암 계곡. 다산 정약용이 가을의 단풍이 아름답다고 노래했던 곳이다.

“화랑방 그 안에서 술을 사오고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 멈추니, /하룻밤 부슬부슬 비 내린 뒤에 /두 기슭 단풍들어 붉은 숲이네.”

 

천진암 터에 암자는 사라지고, 대신 천주교에서 기리는 다섯 분의 묘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권철신(權哲身, 1736~1801), 권일신(權日身, ?~1791), 이벽(李檗, 1754~1785),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묘다. 지금은 조선 천주교의 발상지로 기념되고 있지만, 그때는 권철신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권철신의 호는 녹암(鹿庵)이다. 조선 초 인물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성호 선생이 늘그막에 이르러서 한 제자를 얻었으니 바로 녹암이었다. 그는 영특한 재주에 인자하고 화평하여 재덕을 모두 갖추었다. 성호선생이 녹암을 몹시 아꼈다.” 사교를 전파한 역적으로 죽음을 당했기에 그의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산 정약용이 쓴 그의 묘지명에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권철신의 학문 경향은 도덕적 실천을 중요시했다. 양명학적 경향이 있었는데, 주자학 독존의 당시 분위기상 양명학은 이단시되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고매했다. 정약용이 쓴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효우(孝友)와 독행(篤行)을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에 들면 화기(和氣)가 가득 차있어서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 같았고 난초 향기가 그윽한 방에 들어간 듯했다고 했다.

 

그의 학문과 인격의 명망을 보고, 주위에서 공부하러 찾아오는 젊은이가 많았다. 해마다 겨울이면 권철신의 집에서 가까운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그의 문도들이 강학모임을 갖곤 했다.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도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정약용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녹암이 직접 규정을 정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하고 경건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모두 유학 관련 서적이었다.

 

▲ IMG_8771권철신 묘
▲ 권철신 묘
유학자 권철신에게 새로운 사조의 충격은 이벽으로부터 왔다. 이벽은 자생적으로 한국 천주교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서 천주교를 공부하여 감화되었다. 1783년 겨울 이승훈이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이벽이 시킨 대로 북경의 성당에 찾아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벽은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위해 권철신을 찾아갔다. ‘권철신은 모든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명망 있는 분이니, 그분이 우리 교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벽은 권철신의 집에 10여 일을 묵었다 갔는데, 권철신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그의 동생 권일신은 이벽의 전도에 감화되어 열렬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이벽의 주재로 모임을 하다 포졸들에게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이 사건을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그 여파는 간단치 않았다.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런 동향을 불온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관련자의 집안에서는 놀라 집안 단속에 들어갔다. 이벽은 사실상 집안 연금 상태에 있다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저했던 권철신은 나중에 동생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구해서 읽고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제 권철신과 그의 가족들은 천주교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도의 앞길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해년 진산사건으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정치 이슈화되었다. 동생 권일신이 1791년 신해박해 때 고문당한 여파로 유배 길에서 세상을 떴다. 권철신은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집에 들어앉았다.

 

정조가 죽자 신유옥사가 일어났다(1801).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채제공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천주교를 명분으로 삼았다. 정순왕후가 척사하교를 내리고,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잡아들였다. 이때 권철신도 잡혀갔다. 그에게 혹독한 추궁이 가해졌다. 그는 동생이 죽은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를 멀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권철신은 66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거리에 버려졌다.

 

정약용은 훗날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이렇게 슬퍼했다. “오호라! 인후하기가 기린 같고, 자효하기를 호랑이나 원숭이 같고, 영특한 지혜는 샛별과 같고, 얼굴 모습은 봄날 구름의 밝은 태양 같았는데,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저자의 구경거리로 널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정약용이 권철신의 묘지명을 쓴 것은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권철신 본인의 죄는 언급함이 없이 그의 집안과 이웃의 죄를 권철신에게 덮어씌웠으니 제대로 법을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보기에는, 천주교는 구실이었을 뿐, 훌륭한 선비인 권철신이 정적들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연구는 권철신이 은밀하게 신앙 활동을 계속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약용에 따르면, 권철신의 저서로는 “<시칭(時稱)> 2권이 있고, <대학설> 1권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버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전하고 있다. 정약용은 희정당에 입대하여 대학을 강론했을 때, 그 학설을 권철신이 읽어보고 칭찬해주었다고 했는데, 그의 학문은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지만 그가 천주교도였는지 아녔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권철신이 주위 사람을 보살피는 고매한 인격을 지니고, 덕행과 실천을 추구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억압적 사회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두진 못했다.

글_김태희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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