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이야기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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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에선 서울국제문학포럼이 열리고 있다. 세계문학의 중심에 있는 문호들과 작가들이 모여 오늘날 문학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인데 행사 참여자 중에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벨라루스 출신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있다. 그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낳은 작가로 유명하다. 논픽션이지만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그의 글에는 전쟁과 핵에 의해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들이 담겨 있다.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전쟁을 목격한 전쟁고아들을 인터뷰한 책 <마지막 목격자들>을 차례로 펴냈다. 당시 아프간전쟁이 터진 상황이었고 전장에 직접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프간전쟁의 참상을 다룬 <아연 소년들>을 쓰게 되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발생하자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썼고, 소련 해체 이후에 <세컨드핸드 타임>을 썼다.(생략) 올해가 러시아혁명 100주년인데, 나는 그 100년의 증인이고자 했다.”(한겨레기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는 체르노빌 이후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일 뿐 아니라 재난의 역사가 될 것이라며 핵의 위험성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는 국가가 이용하고 죽인 작은 사람들의 삶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영웅이 아닌 작고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가득 찬 그의 글에는 붉은 울음들이 가득 차 있고 마치 현장에 가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 느껴졌다. 핍진하게 다가오는 목소리들을 읽다가 며칠 전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김소형(37) 씨는 추모글을 읽던 도중 울음을 터뜨렸다. 김씨의 아버지는 전남 완도 수협에서 근무하다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왔다가 목숨을 잃었다.

 

“철없었을 때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도 당신을 보지 못한 소녀가 이제 당신보다 더 커버린 나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을 이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 전의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가는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셨음을…사랑합니다, 아버지.”

 

기념식에 참석했던 대통령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던 숱한 사람들을 울린 이 추모사를 들으면서 우리 현대사를 생각해보았다. 일제식민지시대와 4·3, 6·25와 5·18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람들이 시작한 전쟁과 비극 중에서 희생된 것은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작은 사람’들이었다. 역사가 소수 영웅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이야기라면 그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숱한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누가 기록하고 후세에 전해야 하는 걸까?

 

고은 시인의 <만인보>가 새삼 소중하게 다가오는 까닭도 이때문이다. 묵묵히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이름 없는 사람들이 좀 더 기억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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