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14. 백성을 사랑하고 시대를 걱정한 ‘율곡이이’

서경덕·이황을 넘어… 조선철학사 새 지평을 열다

금강산에 올라 느꼈던 감회를 노래한 ‘비로봉에 올라’란 시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쓴 모자로 동해바다를 한 손에 쳐든 술잔으로 표현할 정도로 율곡의 기상이 드높다. 율곡이 여덟 살 때 지은 ‘화석정’을 살펴보자. “산은 외로이 둥근 달을 토해내고[山吐孤輪月], 강은 만 리의 바람을 품었네[江含萬里風]” 파주 고향의 밤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한 소년 율곡의 재주가 놀랍다. 율곡은 평생 50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정언묘선>이라는 시선집도 편찬한 빼어난 시인이다. 율곡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시가 …가슴속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낸다”고 했다. 

 

자운서원, 율곡이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15년에 묘소 아래 세웠다.
자운서원, 율곡이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15년에 묘소 아래 세웠다.

■ 어머니 신사임당

이이(李珥, 1536~1584)의 호 율곡(栗谷)은 이황의 호 퇴계와 더불어 우리에게 친숙한 호다.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파주 고향 마을 ‘밤골’의 지명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은 아버지 이원수보다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신사임당은 율곡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칠 정도로 높은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여성 선비였다. 소년시절 율곡에게 어머니 신사임당은 하늘이자 바다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16세 어린 나이에 그런 어머니를 잃었다. 삼년상을 마친 율곡은 아버지는 물론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출해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여기서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과 어머니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심각한 불화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한 해 뒤에 환속했으나 율곡이 한때 승려로 지냈던 사실은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됐다.

 

하산 이후 율곡은 학문에 전념했다. 1559년 봄, 율곡은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상주 목사인 장인을 찾았다가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상도 예안의 퇴계 이황(1501~1570)을 방문해 사흘을 머물렀다. 이때 퇴계는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가 두려움)라는 성인의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라며 율곡을 격려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찰을 통해 이기설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율곡보다 35세 연상인 퇴계는 사대부들은 물론 국왕 선조의 존경을 받았던 대학자였으나 율곡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이 지은 ‘성학십도’의 순서를 바꿨을 정도로 율곡을 존중해줬다. 율곡은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숙했다. 평생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며 제자를 길렀던 화담의 인품과 학식을 깊이 사모했던 것이다. 율곡은 화담의 제자 박순과 정치와 학문의 든든한 동지로 지냈다. 화담이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했고,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는데, 율곡은 이 둘을 뛰어넘어 이와 기가 하나로 통합돼 있다는 이기이원적 일원론을 정립해 조선철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율곡의 이기론은 선악을 둘로 구분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성선설을 더욱 강조하여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신뢰를 확대했다.

 

노비와 서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율곡의 시선은 따뜻했다. 서얼 허통과 노비의 속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첩에게서 얻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대를 잇도록 했던 것도 이런 신념의 실천이었다.

 

율곡은 선조의 당부를 받고 사서(四書)를 한글로 풀이했다. 이때 완성된 율곡의 <사서언해본>은 교서관 활자본으로 간행돼 한자를 모르는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읽혔다. 율곡이 해주에서 형제와 조카 등 가까운 종족을 모아 함께 살 때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 ‘동거계사’라는 생활 규칙도 한글로 기록했다. 이들 통해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율곡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파주 자운산에 있는 율곡의 묘소.
파주 자운산에 있는 율곡의 묘소.

■ 평생의 화두, 안민

율곡의 평생 화두는 ‘안민(安民)’이었다. 임금의 임무 역시 안민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율곡이 마흔 살이 되던 1575년에 선비사회가 동서로 나뉘어 싸우는 붕당 정치가 시작됐다. 화합과 조정에 힘을 쏟던 율곡은 그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내려갔다. 1577년 5월, 선조는 율곡에게 대사간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율곡은 이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시사에 대해 물을 것이 있으시면 하문하시고, 그 말이 채용될 수 없다면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

 

차가운 대답이지만 선조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대가 품은 생각이 있으면 글로 써서 올리라” 일말의 희망을 품은 율곡은 파주 고향집에서 현재의 폐단을 진술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글의 분량이 1만 자에 이르렀기에 ‘만언봉사’로 불리는 글이다.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큰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는 것이 없어, 겨우겨우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 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날로 더 썩어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그 집과 오늘의 나라꼴이 무엇이 다르다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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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를 ‘썩은 집’이라니 무서운 비유였다. 보통 신하 같으면 열 번은 귀양을 가고도 남을 불경한 소리였다. 그러나 율곡을 깊이 존경했던 선조는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벼슬길에 나선 지난 10년 동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임금에게 경장을 거듭 건의했으나 단 하나도 실천하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율곡은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매섭게 질책하며 거듭 결단을 촉구했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며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신의도 여지없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거나 도적이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고, 신의로 유지할 수도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시려고 하십니까?”

 

이에 대한 해답이었을까. 1582년 말, 선조는 율곡에게 병조판서를 맡겼다. 군정을 개혁하는 세부 방안을 제시했으나 반대여론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번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10년 뒤 임진왜란을 겪으며 선조는 율곡의 선견지명을 탄식했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선비사회를 화합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성혼, 정철과의 교우관계 때문에 서인의 지지를 받았으나 동인의 배척을 받아야 했다. 이이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서인으로 지목됐을 뿐 아니라 서인의 종장으로 추대됐다. 율곡의 이러한 처지를 오리 이원익(1547~1634)은 이렇게 평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언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때 한 사람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두 사람이 듣지 않자 언덕에서 내려와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 했는데,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1583년 늦가을, 선조는 율곡을 이조판서에, 성혼을 이조참의에 임명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 이후로는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좋다. 만일 이이와 성혼을 훼방하고 배척하는 자라면 반드시 죄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모처럼 선조가 율곡의 개혁 정책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 16일, 율곡은 서울 대사동 집에서 쓸쓸하게 운명했다. 쉰도 채우지 못한 나이였다. 잘난 벼슬아치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은 율곡을 제대로 보았다. 아래는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율곡의 졸기(卒記)의 일부분이다.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했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해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와 부의를 거두어 염해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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