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정중부·이의방·이고가 난을 일으켰다. 사흘 만에 의종을 내쫓고 동생 호(皓)를 추대했다. 호-명종-는 난 주동자 3인의 초상을 조정 벽에 붙였다. 이후 이고는 이의방에게, 이의방은 정중부에게,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각각 제거됐다. 이 과정에서 왕이 행사한 권한은 없다. 그저 벽상공신끼리의 권력 다툼을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100년이 고려 무인시대(武人時代)다. ▶조선조 태종은 개국공신에 대한 정반대 역사를 남겼다. 태조 7년(1398년), 이방원이 무인정사(戊寅靖社)를 일으켰다. 왕-태종-에 오른 그가 개국공신들을 숙청했다. 이숙번, 이거이 등 공신들을 귀향 보내고 처형했다. 공신 반열에 있던 처남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도 처형했다. 사료(史料)로 남은 기록 가운데 가장 냉정한 토사구팽이다. 세자 이도-세종-의 장인이던 심온까지 제거했다. 후임 세종은 우리 역사 최고의 성군이 됐다. 아버지 태종의 공신 퇴출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견해가 많다. ▶2012년 12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인 캠프로부터 흘러나온 한 마디가 측근 모두를 긴장시켰다. 인사 청탁을 하는 측근에게 했다는 “이러려고 그러셨어요”라는 한 마디다. 이후 박 전 대통령 주변에선 배신의 역사가 시작됐다. 경제 민주화를 학습시켰던 김종인, 학자 출신의 특등 공신 이상돈 등이 줄줄이 퇴출됐다. 혈육(血肉)들의 청와대 출입도 금지됐다. 많은 언론이 ‘공신 배격’ ‘측근 퇴출’이라고 썼다. ‘적어도 공신이나 측근에 의한 비리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내놨다. ▶진짜 공신이 숨어 있었다. 40년 지기 특등 공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를 제거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 정권 공신보다 막강한 권력을 거기에 흘렸다. 그리고 그 권력은 과거 어떤 공신보다 거대한 비리를 저질렀다. ‘이러려고 그러셨어요’로 시작한 박근혜 정부. 가혹하리만큼 공신 척결에 칼을 휘둘렀다던 박근혜 정부. 돌이켜 보면 그 작업은 ‘특등 공신’을 위한 가지치기였다. 흉내는 세조의 공신 숙청이었지만, 결과는 명종의 공신 휘둘리기였다. 임기 중 퇴출과 구속이라는 참담한 결과만 안았다. ▶고금의 모든 권력은 출발과 함께 ‘공신 관리’라는 숙제를 안는다. 이 숙제에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다. 굳이 교훈을 찾는다면 ‘중용’(重用)이 아닌 ‘중용’(中庸)을 택하라는 것 정도다. ‘권력의 중심에 기용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취임 20일을 지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이런 공신 세력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저마다 ‘우리가 도왔으니 빚을 갚으라’며 청구서를 들이미는 모양이다. ‘重用’ 아닌 ‘中庸’의 묘(妙)가 필요해 보인다.
김종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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