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16. 청백리의 대명사 오리 이원익

정약용이 극찬한 ‘명재상’… 비 새는 초가서 산 ‘청백리’

이원익 호성공신도상(扈聖功臣圖像), 보물 제1435호
이원익 호성공신도상(扈聖功臣圖像), 보물 제1435호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외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 

다산 정약용이 오리 이원익의 초상을 보고 지은 글이다. 다산이 상상한 이원익은 장대한 체구에 근엄하고 씩씩한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원익은 임진왜란 때 장수의 신분으로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최대의 언사를 동원해 오리 이원익의 위대한 생애를 표현했다.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은 500년 조선의 청백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선조, 광해,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국가의 최고 원로가 비바람도 피하기 힘든 작은 초가집에서 어렵게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조가 극구 사양하는 이원익을 겨우 설득해 내린 집이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막내아들 익령군 치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종실이지만 이원익의 유년시절은 넉넉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병약했던 까닭에 젖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게다가 어릴 때 자주 병마에 시달렸는데 9살 때 어머니마저 잃었다. 그래서일까 이원익은 장성해서도 이름 앞에 ‘키 작은’이란 말이 늘 따라다닐 정도로 키와 몸집이 작았다.

 

이원익은 23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서 28세 때 황해도 도사로 일하며 군적을 깔끔하게 정리해 관찰사이던 율곡 이이의 칭찬을 받았다. 이후 우부승지로 재직하다가 파직되고 이어 부친상을 당해 내리 5년을 야인으로 지냈다.

 

1587년 10월 이원익은 평안도 안주 목사에 임명됐다. 안주는 기근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명을 받은 다음날 이원익은 홀로 말을 타고 안주로 향했다. 부임하는 길에 굶주려 죽어가는 심각한 현장을 확인한 이원익은 평양으로 달려가 감사에게 환곡 1만석을 빌려 굶주린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했다. 진단은 정확하고 조치는 신속했다.

이원익이 안주에서 양잠을 일으킨 일도 두고두고 칭송을 받았다. 토질에 맞지 않는다며 양잠을 하지 않던 안주에 뽕나무를 심도록 적극 권장해 몇 년 지나지 않아 안주는 조선 최고의 명주산지가 됐다. 또한 3개월이던 군 복무기간을 2개월로 줄이고 제도화했다. 이러한 선정을 펼쳐 이원익의 이름은 평안도 전역에 알려졌다.

인조가 지어 하사한 ‘관감당’
인조가 지어 하사한 ‘관감당’

1592년 4월, 20만의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를 덮었다. 임진왜란으로 양반사대부들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던 신립이 충주전투에서 완패하고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조가 이원익을 불렀다. 황해도와 평안도민들이 이원익의 선정을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순찰사의 임무를 맡겼다. 선조의 판단은 적중했다. 

이원익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해 선조의 피난길을 예비하며 도순찰사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 사이 한강과 임진강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평안도는 이제 조선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이원익은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지역민들을 설득해 군량을 마련하고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방어에 나섰던 것이다. 흐트러진 지휘체계도 몸을 낮춰 바로 세웠다.

 

이원익의 활약으로 평안도는 빠르게 안정됐다. 그러나 선조는 평양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평양방어의 책임을 맡은 이원익은 과감한 작전을 지휘했다. 이원익의 명을 받은 240명의 조선군이 한밤에 능라도 왜군진영을 기습해 수 백 명을 살해하고 말 133필을 빼앗은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퇴각하는 병력을 실어 나를 배가 제 시각에 도착하지 않아 왜군의 추격을 받아 아군 수십 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평양성마저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 이원익을 본받으라

안주를 비롯해 순안과 중화 같은 고을을 순회하며 흩어진 병력을 모았다. 이원익이 시행한 군사훈련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유능한 지휘관을 선발해 교육을 맡기고 신상필벌을 분명히 해 기본을 세웠다. 이원익이 담당한 업무인 군량확보와 군사훈련은 욕을 얻어먹기 좋은 일이었으나 백성들은 찬사를 보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원칙과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원익이 활약상은 명 황실까지 알려졌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된 이원익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때 평양의 인현서원에 ‘서검재(書劍齋)’를 세워 유생들에게도 반드시 무예를 익히게 했다. 서검재를 평안도 전 지역의 향교에도 확대 실시했다. 고을마다 있는 향교와 서원을 활용해 군사교육을 시행한 것은 임기응변이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평안도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당시 이원익의 활동을 사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오리 이원익 영정을 모신 영당.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오리 이원익 영정을 모신 영당.

“이원익은 스스로의 몸가짐을 청렴하고 간소하게 해 하루에 먹는 음식이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민폐를 살피고 무비(武備)를 잘 닦았기 때문에 비록 전쟁을 겪었어도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

 

1595년 이원익은 우의정 겸 사도(경상 전라 충청 강원) 도체찰사에 임명됐다. 성주에 도체찰부를 설치한 이원익은 도원수 권율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경상 병사 곽재우를 비롯한 휘하 장수를 지휘하고 명군 진영을 드나들며 전투를 독려했다. 

당시 경기를 비롯한 이북 4도의 체찰사는 서애 유성룡이다. 이원익은 이순신과 곽재우 같은 무장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전란 극복의 지혜를 모아나갔다. 죽을 위기에 처한 이순신을 끝까지 옹호한 것도 이원익이다. 이 무렵 실록에서 이런 기사를 찾을 수 있다.

 

“도체찰사 이원익이 남방으로 내려간 뒤에 백성이 울며 애모(愛慕)하였고 이번에 올라와서는 오로지 민폐를 덜어 주었으므로 도탄에 빠진 백성이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이원익을 급히 남방으로 내려 보내어 인심을 진무하고 무비를 감독·수선하여 급할 때에 쓸 여지로 삼으소서”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1598년 11월 왜군이 철수하면서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날 무렵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이원익이 귀국했을 때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역적으로 몰린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이원익은 전 생애를 통 털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 빠졌으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

 

■ 정치의 목적은 ‘안민’이다

이원익은 자신을 철저히 단속했다. 1600년 11월 9일, 영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삼정승이 선조에게 건의했다. “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도체찰사 이원익이 노쇠한데다가 너무 야위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소식(素食)으로 몸을 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약을 복용하더라도 만약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회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원익이 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것은 물론 일반백성들이 풀뿌리로 연명하는데 감히 고기를 먹을 수 없다며 거절한 것이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이원익을 초대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광해군을 매섭게 비판하던 이원익은 결국 홍천에 유배됐다. 1623년,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이원익을 초대 영의정에 임명했다. 

이원익이 한양에 나타나자 민심이 안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정주역들은 광해군을 죽이려했다. 특히 광해군에게 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을 모두 잃은 인목대비의 원한은 깊었다. 이원익은 광해를 죽여야 옥쇄를 내주겠다는 인목대비를 설득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이원익의 정치철학은 ‘안민(安民)’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일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소서.” 평생 실천한 것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찾아내 짐을 덜어주어 살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 5월 7일 경기도에서 경기선혜법이 시작됐다. 실록은 이것이 “이원익의 발의로 시작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제도는 훗날 대동법이란 이름으로 전국에 확대됐다.

 

■ 청백리의 표상이 되다

‘오리선생문집’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많은 내용은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문이다. 그러나 인조는 이원익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조정에 출입하기도 어려운 상태였음에도 강권했다. 그만큼 인조는 이원익을 의지했다. 1634년 정월, 이원익은 마침내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8세. 실록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광명시 소하동)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