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영화 속의 유봉(김명곤 분)은 송화(오정해 분)에게 소리를 뽑는 가혹한 훈련을 시킨다. 송화의 판소리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유봉은 만족하지 않고, 그 무엇의 부족함에 가슴을 태운다. 마침내 송화의 두 눈에 청강수를 떨어뜨려 눈을 멀게 한다. 소리를 위해 눈이 먼 그녀는 완벽한 서편제 소리꾼이 된다. 그 목소리에 ‘한’이 젖어든 것이다.
에밀레종 소리에 얽힌 전설 역시 너무 처절하다. 국보 29호인 에밀레종의 공식 이름은 성덕대왕신종. 1200년 전 신라 때 만들어진 이 종은 몇 번을 거듭해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예언자의 계시대로 어린 소녀를 펄펄 끓는 청동 가마에 산 채로 던졌더니 비로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웅웅…’하는 종소리에는 엄마를 부르는 소녀의 외침이 배어있다는 것이고 그 ‘한의 소리’를 세계가 감탄하고 있으며 이 특별한 음향학적 기술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사실 서편제나 에밀레종과 같은 ‘소리의 한’ 말고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넓고 깊게 ‘한’이 자리 잡고 있다. 강대국의 끊임없는 외침 속에 살다보니 그렇게 됐고, 모진 가난, 신분사회, 그리고 남녀 차별이 ‘한’을 쌓이게 했다.
정치도 ‘한의 문화’가 갖는 용광로에 녹아 ‘한국적 정치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몇일 전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는 야당과의 국회정상화, 특히 추경 합의가 불발로 끝나자 눈물을 보이며 야당을 ‘국정 발목잡기’라고 비난했다. ‘국정 발목잡기’니 ‘정치 공세’니… 참 익숙한 말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민주당이 발목을 잡고, 국회 선진화법에 묶여 시급한 민생문제가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더니…. 장관들의 인사청문회도 마찬가지. 박근혜 정권 시절,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교회 강연에서의 내용이 친일적이라는 이유로 야당은 총리 인준을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낙마했다. 사실 그 내용은 상당부분 왜곡된 면이 많았음에도 당시 분위기는 막무가내였다.
그에 앞서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교육부총리로 청문회까지 통과되었으나 지금 교육부총리에 지명된 김상곤 전경기도교육감(당시 전국교수노동조합위원장)으로부터 강력한 사퇴 압력을 받았다. “도덕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학생들의 교육을 지휘감독하고 교수들의 연구를 촉진해야할 교육부총리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
결국 그는 몇일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했는데, 이번에는 공수가 뒤바뀌어 김상곤 교육부총리 후보자가 역시 똑같은 의혹(논문 표절)으로 야당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고 있다. 이래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여당 할 때 다르고, 야당 할 때 다르다는 결국 ‘한풀이 정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풀이 정치’로는 조선왕조의 비극적 당쟁사가 웅변해주듯, 정치의 미래는 없다.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돼도 ‘서편제’처럼 멀쩡한 눈에 극약을 넣어 장님을 만들어서까지 ‘한’을 찾는 정치는 이제 끝내야 한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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