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4.19의 ‘가투’(가두투쟁, 거리시위) 현장을 빠른 필체로 스케치하듯 형상화 한 거예요. 대상의 묘사나 구체적인 표현보다는 그날의 긴박했던 순간을 기록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죠. 그래서 어떤 미적 형식이나 사조의 흔적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도 이 회화가 새김의 미학으로 읽히는 것은 부상당한 한 사람과 그를 어깨걸기로 부축하고 있는 두 사람 때문이에요.
그것은 마치 17세기 피에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보여주는 듯해요. 세 인물은 화면의 맨 앞에서 주제를 압도하고 있으며, 그들 뒤로는 펼침막을 들고 뛰는 수많은 학생 시위대가 이어지거든요. 그 혁명은 미완이었으나, 혁명의 물결은 5.18민주항쟁과 지난 겨울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잖아요.
그는 역사에 바쳐진 한 ‘희생’과 그 뒤를 따르는 거대한 ‘함성’을 깊게 새겨 놓음으로써 시대의 첫 벽화를 직조해냈던 거예요.
손장섭 작가의 회화는 ‘그리다’의 동사를 ‘새기다’로 바꿔야 더 잘 보여요. 그는 캔버스에 무엇을 그려서 ‘그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붓으로 새겨서 깊이 각인(刻印)시키는 ‘마음의 회화’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마음의 회화는 기억의 새김이고 기록의 새김이며, 그래서 그것은 ‘역사화’의 얼굴일 거예요. 그 얼굴에서 이 땅의 산하와 그 산하에서 자란 나무와 숲과 바다와 민중들의 서사를 읽지요.
사람들이라 하지 않고 굳이 ‘민중들’이라 표현한 것은 그 산하의 회화적 돋을새김이 금강산이고 설악산이고 북한산이고 백령도이고 독도이고 통일전망대이고, 동해의 철책이기 때문이에요. 또 그 나무의 돋을새김이 수백 수천 년을 이 산하에 뿌리박은 신령한 은행나무요 느티나무요 관음송이요 백송이요 향나무요, 주목이기 때문이죠.
한반도의 산하와 나무와 숲과 바다와 거기에 오래 깃들어서 그것으로 풍경의 한 일부가 된 ‘신령한’ 사람들이 곧 이 땅의 민중이지 않을까요?
역사를 창조해 온 직접적인 주체이면서도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회적 실체로서의 민중, 그런 민중에의 인식은 그가 민중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 창립에 참여했고, 민족미술인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그 스스로의 민중적 삶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의 화력(畵歷)을 시작할 무렵인 약관(弱冠)의 어린 나이에 4.19혁명을 겪은 것과 관련이 깊을 거예요.
마음의 회화로 첫 ‘새김의 미학’을 창조한 작품이 바로 그 장면을 새긴 ‘사월의 함성’이지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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