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손장섭의 ‘사월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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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8일에 막을 내린 ‘손장섭: 역사, 그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회화’(학고재) 전시에 ‘사월의 함성’(1960)이 나왔더군요. 서라벌예고 3학년이던 그해 1960년 봄, 그는 시위현장에 나갔다가 덕수궁 대한문 근처의 골목에서 학생들이 뛰쳐나오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그걸 마음에 새겼다가 그린 거죠.

 

작품은 4.19의 ‘가투’(가두투쟁, 거리시위) 현장을 빠른 필체로 스케치하듯 형상화 한 거예요. 대상의 묘사나 구체적인 표현보다는 그날의 긴박했던 순간을 기록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죠. 그래서 어떤 미적 형식이나 사조의 흔적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도 이 회화가 새김의 미학으로 읽히는 것은 부상당한 한 사람과 그를 어깨걸기로 부축하고 있는 두 사람 때문이에요.

 

그것은 마치 17세기 피에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보여주는 듯해요. 세 인물은 화면의 맨 앞에서 주제를 압도하고 있으며, 그들 뒤로는 펼침막을 들고 뛰는 수많은 학생 시위대가 이어지거든요. 그 혁명은 미완이었으나, 혁명의 물결은 5.18민주항쟁과 지난 겨울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잖아요.

 

그는 역사에 바쳐진 한 ‘희생’과 그 뒤를 따르는 거대한 ‘함성’을 깊게 새겨 놓음으로써 시대의 첫 벽화를 직조해냈던 거예요.

 

손장섭 작가의 회화는 ‘그리다’의 동사를 ‘새기다’로 바꿔야 더 잘 보여요. 그는 캔버스에 무엇을 그려서 ‘그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붓으로 새겨서 깊이 각인(刻印)시키는 ‘마음의 회화’를 보여주기 때문이죠.

 

마음의 회화는 기억의 새김이고 기록의 새김이며, 그래서 그것은 ‘역사화’의 얼굴일 거예요. 그 얼굴에서 이 땅의 산하와 그 산하에서 자란 나무와 숲과 바다와 민중들의 서사를 읽지요.

 

사람들이라 하지 않고 굳이 ‘민중들’이라 표현한 것은 그 산하의 회화적 돋을새김이 금강산이고 설악산이고 북한산이고 백령도이고 독도이고 통일전망대이고, 동해의 철책이기 때문이에요. 또 그 나무의 돋을새김이 수백 수천 년을 이 산하에 뿌리박은 신령한 은행나무요 느티나무요 관음송이요 백송이요 향나무요, 주목이기 때문이죠.

 

한반도의 산하와 나무와 숲과 바다와 거기에 오래 깃들어서 그것으로 풍경의 한 일부가 된 ‘신령한’ 사람들이 곧 이 땅의 민중이지 않을까요?

 

역사를 창조해 온 직접적인 주체이면서도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회적 실체로서의 민중, 그런 민중에의 인식은 그가 민중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 창립에 참여했고, 민족미술인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그 스스로의 민중적 삶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의 화력(畵歷)을 시작할 무렵인 약관(弱冠)의 어린 나이에 4.19혁명을 겪은 것과 관련이 깊을 거예요.

 

마음의 회화로 첫 ‘새김의 미학’을 창조한 작품이 바로 그 장면을 새긴 ‘사월의 함성’이지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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