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를 빛낸 인물] 이원익 (1547~1634)

3대에 걸쳐 영의정 지낸 조선의 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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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156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587년 안주목사에 기용돼 생업을 안정시켰다.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이원익이 권장해 심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하기도 했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됐을 때 대동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했다.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성품이 소박하고 정의감이 투철했다. <오리집> <속오리집> <오리일기> 등을 썼다. 경기도 광명에 묘소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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