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해방되고 1962년 마침내 귀국했으나 지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아픈 외로움이 그녀의 영혼을 잔인하게 찢어 놓았을까? 물론 그녀가 임금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테고, 감방에서 외로움을 삭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 그 운명적 고독은 반드시 남·여,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크든 작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삶의 동반자가 아닐까?
요즘 친구들끼리 나누는 농담이 있다. “70대에 밥해줄 마누라가 있으면 행복하고, 80대에도 전화하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 80대에 전화 걸려 오는 것이 행복일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나이 먹어가면서 영혼에 짙게 젖어 오는 것은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병이라도 들면 더욱 그렇다. 하나 둘 가까웠던 사람들이 떠나고, 가족들도 뿔뿔이 헤어져 험난한 세상 살다 보니 혈육의 끈은 멀어지는데 이럴 때 전화 한 통화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전부터 관여하던 모임에 나가 젊은 세대들과 어울려 보고 싶지만 그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그러니 어디서 누구와 어울릴까?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이런 휴가철이면 휴양지에 가서 유유자적하련만 그런 형편이 못 되는 대부분의 노인들에게는 삶 자체가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아니, 그렇게 세계여행을 하고 호화 리조트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모를까? 오히려 더 외로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외로움은 두려워해야 할 병일까.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면 외로움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깊은 에너지일 수 있다는 생각도…. 특히 앞의 시에서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에서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은 언제 외로워 눈물을 흘리셨을까? 나는 가끔 예수님이 언제 가장 외로우셨을까 생각해 본다. 당신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있는데, 십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랑하는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어머니 마리아만 눈에 보일 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절망적인 외로움을 극복함으로써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외로움의 포로가 되자는 것도, 즐기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피하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성숙시키는 에너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전화를 기다리는 내 자신임을 어찌 하랴.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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