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23.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 대동법

방납제도 관리·상인 부정부패 심각,

1610년 9월24일. 광해 임금이 왕이 된지 2년 되던 9월에 조정에서 특별한 논의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구하고 전쟁이 끝나자 홀연히 경상도 청도 비슬산으로 은거했던 곽재우의 상소에 대한 논의였다. 곽재우는 선조에게 국왕으로서 올바른 처신을 하라는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고 사라졌던 인물이었다. 곽재우는 비슬산으로 들어가 전쟁이 끝난 후 또 다시 권력을 틀어쥔 양반들로부터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보았다. 그는 조선이 다시 온전한 국가로 돌아가려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이 세금 제도를 공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광해 임금이 즉위하던 해에 경기도에 실시했던 선혜법(대동법)을 전국에 확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선혜청을 새로 만들어 경기도에서 실시한 대동법이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혜택을 주고 있기에 이 법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 대동법의 전국 시행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후 숙종대 가서야 8도에 실시됐다. 그러니 대동법이 만들어지고 정확히 100년이 지나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개혁법안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면 시행이 되지 못하고 숙종대에 확대된 것일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이 대동법의 시행과정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기념비의 모습
▲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기념비의 모습

■ 대동(大同)이란

 

대동(大同)이란 무슨 의미일까. 조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되는 정조는 ‘대동’에 대해 이런 표현을 썼다. “대동이란 함께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함께 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면 이는 자신이 안락(安樂)해지는 것이요, 후손들이 잘 될 것이다.”

 

이처럼 좋은 대동이란 말을 우리는 은근히 무서워한다. 기득권 세력들은 대동이라는 말을 사회 기득권층에 대한 도전이라고 인식하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동이란 말은 너무도 많이 등장했다. “대동 세상을 꿈꾸며” 혹은 “대동 세상을 만들자” 라는 구호들은 일반 서민대중에게는 복음같은 말로 들렸고 자본가와 기득권 세력들에게 공산사회를 추구하자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대동을 주창하다가 엄청난 옥사(獄死)를 치룬 선조년간의 정여립 사건 때문이기도 하다. 백성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잘살기를 희망했던 정여립은 고향 전주로 내려가 ‘대동계(大同契)’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양반 사대부와 일반 백성 그리고 노비와 천민 등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는 진짜 대동세상을 만들자고 정여립은 제안했고, 이 힘으로 외세였던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자고 했다. 실제 대동계원들의 힘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서해안으로 진격했던 왜구들을 막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동계는 조선 정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양반사대부들의 기득권에 대항한다는 이유로 1천여 명 이상이 죽었다. 그 이후 대동이란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잘 사용되지 못했고, 현대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대동은 말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특히 정여립의 대동계 모반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개혁가들은 다시 대동이란 말을 들고 나왔다. 대동이란 엄청난 역사적 무게가 담긴 이름의 법을 제안한 것이다. 바로 기존의 조세체제 즉 백성들이 국가에 내야할 잘못된 세금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조세형평운동의 기치를 내건 것이다.

 

남양주 영의정 김육
남양주 영의정 김육

■ 조선시대 방납제도의 폐단

 

국가의 재정은 당연히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국민이 반드시 해야 할 4대 의무를 정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납세의 의무인 것이다. 만약 어느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상한 명분을 내세워서 세금을 내지 않는 다면 이는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현대사회도 국민들이 세금을 내서 국가운영을 하듯 봉건 왕조 사회에도 백성들이 세금을 내어 국가를 운영했다.

 

조선시대는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토지 소유세를 내야 했다. 이를 ‘전세(田稅)’라고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토지세 말고 특별한 세금을 추가로 국가에 내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물을 바쳐야 하는 공납(貢納)이다. 충청도 한산은 모시가 특산품이니 모시를 바쳐야 하고 경상도 상주는 곶감이 특산품이니 곶감을 바쳐야 하고, 흑산도는 전복이 유명하니 전복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각 지역이 중요 특산품이 해마다 엄청나게 많이 수확되는 것도 아니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환경요인으로 인해 생산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이 지역에 계속 동일한 특산품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는 다행이다. 해당 지역에 전혀 생산되지 않는 특산품을 조정에 바치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다. 해당 지역에 생산되지도 않는 물품을 요구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탁상행정인데 조선시대 이러한 탁상행정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백성들은 자신들이 부족한 물품을 조정에 바치기 위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물품을 사다가 바치는 참담한 일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러한 불합리를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관리들은 방납(防納)이란 제도는 만들었다. 즉 지역의 백성들이 상인들에게 돈을 주어 해당지역이 물품을 사다가 조정에 바치는 제도였다. 처음 의도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방납 제도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아주 고약한 법률로 바뀌었다. 지역의 관리들과 상인들이 짜고 물품의 원가보다 몇배의 수수료를 내게 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성들은 너무도 많은 수수료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양반들은 이런 저런 명분을 들어 일체의 세금을 회피했다. 그러니 땅 한평도 갖고 있지 않고 양반들의 땅을 빌려 소작하는 백성들만 지속적으로 공물에 대한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조정의 관리들이 상인들이 사가지고 온 물품을 퇴짜 놓기도 했다. 자신들이 지정해준 물품으로 사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이는 조정 관리들과 특정 상인세력들이 손을 잡고 이익을 얻기 위한 부정부패의 전형이었다.

 

공물·진상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예헌(禮獻)의 의미마저 지니는 것이어서 좀처럼 개혁되지 못했고, 또 방납인들의 이권이 개재되고 있었던 데서 쉽사리 개선되지도 못했다.

 

남양주 영의정 김육과 그의 묘
▲ 남양주 영의정 김육의 묘

■ 대동법의 시행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이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지 않으면 조선의 농민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국가는 운영될 수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개혁가들은 방납의 폐단을 시정할 새로운 개혁 법안을 제안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이었다. 이들은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란 이름으로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유성룡이 제안한 것은 각 군현에서 상납하던 모든 물품을 쌀로 가격을 환산해서 그 수량을 도별로 합산해서 도내 농토에 고르게 부과해 현재 1만6천529㎡ 정도인 1결에 살 2말을 징수하게 하고, 이를 호조에서 수납해 공물과 진상·방물의 구입경비로 쓰는 한편, 시급했던 군량으로도 보충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 법의 편익을 체험한 한백겸, 이원익 등이 그 내용을 한층 보완해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바로 1608년 5월7일이었다. 경기도가 개혁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다는 ‘선혜’라는 말은 광해 임금이 지은 말로, 선혜청의 책임자는 영의정으로 하여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다.

 

선혜청을 통한 대공수미법의 실시로 지금까지 가구 단위로 특산물을 내던 공납은 이제 쌀을 토지에 부과하면서 토지 주인인 양반의 부담은 늘고 상대적으로 농민의 부담은 줄어들게 됐다. 당연히 양반 지주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거셌고 농민들은 환영했다. 더욱이 양반만이 아니라 이 법의 시행을 조정의 관료들과 상인들이 더욱 심하게 막았다. 그간 자신들이 얻었던 이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부정과 부패를 통해 이익을 얻던 그들이 개혁법안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도도한 개혁의 강물을 막을 수 있겠는가.

 

대동법 시행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조선 최고의 경세가였던 김육(金堉)이었다. 그는 대동법이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구민책이자 국가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고 주장해 1651년(효종 2년)에는 충청도, 1658년(효종 9년)에는 전라도에 시행됐다. 그리고 마침내 1708년(숙종 34년)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됐다.

 

대동법 시행 후 정부는 공인(貢人)에게 백성들에게 걷은 대동미를 주고 대신 필요한 물품을 사오도록 했고 이것은 새로운 시장 수요를 창출해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계기가 됐다. 곧 신분제의 변화와 서민문화의 발달로 이어져 조선 후기가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경기지역에서 처음 실시했던 대동법 시행은 백성을 살려 나라를 보전한 조선 최고의 개혁이었다.

 

김산 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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