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다. 박규수의 아버지인 박종채(朴宗采, 1780~1835)는 박지원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새기고자 <과정록>을 썼다. 이러한 자세는 손자에게까지 미쳐, 박규수는 할아버지의 영향권에서 성장했다. 박규수는 할아버지가 쓴 <열하일기>를 숙독하면서 뜻을 키우고 있었다.
젊은 박규수에게 중요한 사건이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와의 관계였다. 순조는 왕권 회복을 기대하면서 총명한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1827). 효명세자는 박규수에게 기대감을 보였다. 효명세자의 활동은 당시 순조의 장인으로 실력자인 김조순(1765∼1832) 등에 위협적인 것이었다. 박규수는 반남 박씨였는데, 그의 집안은 당대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김조순의 안동 김씨 집안과 협력하면서도 경쟁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효명세자는 요절했다(1830). 박규수 나이 24세였다. 그는 자호의 환(桓)을 환(瓛)으로 바꿨다. 효명세자를 향한 충성을 다짐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후 42세(1848년) 관직에 나갈 때까지 은둔했다.
그동안 중국은 아편전쟁(1840)을 겪는 등 서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박규수는 당시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존명의식과 소중화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위원(魏源, 1794~1857)이 실질적인 편자였던 <경세문편(經世文編)>과 그가 쓴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접했고, 이로 인해 고염무(顧炎武, 1613~1682)와 위원의 경세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내외의 위기를 맞아 대책을 강구한 중국 선각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벗 윤종의(尹宗儀, 1805~1886)가 쓴 <벽위신편(闢衛新編)>에 대해 「평어(評語)」를 썼다. <벽위신편>은 천주교와 서양의 침략을 물리칠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규수가 위원의 <해국도지>를 읽은 것을 바탕으로 대책을 제시한 것이다. 박규수는 천주교에 대한 유교의 우월성을 신뢰하여 탄압보다 교화가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늦게 관직에 나간 박규수는 48세에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1854). 친구의 아버지를 탐관오리로 지목하여 봉고 파직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친구가 절연을 하기도 했지만, 박규수가 공과 사를 구분하는 강직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정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여 청나라 함풍제가 열하로 피신했다. 이 사실을 듣고 조정에서 열하 문안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 박규수가 자원했다. 다른 때라면 사신으로 가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중국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자원하여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임명되었다.
박규수를 보내는 벗들은 박지원의 <열하기행>을 거론하면서 그에 상당하는 소득이 있기를 기원했다. 박규수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정세를 파악하면서 명승지를 답사하고 중국 인사들과 교유했다(1861). 그는 서양세력이 영토 점령보다 교역과 포교에 주력하며 중국에 계속 진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청이 외우내환으로 약화되었지만 민심이 안정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규수는 동양 유교문명과 서양 기독교문명과의 충돌로 보고, 비록 위기이지만 궁극적인 승리를 낙관했다. 이런 생각은 이미 「벽위신편 평어」에도 나타났다. 이러한 기조 속에 청과의 협력을 통해 유교문명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해 청과 조선은 공동운명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박규수의 판단은 너무 낙관적인 것이었다. 그즈음 중국은 위기의식 속에 동도서기론에 근거해 양무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의 신료 가운데 박규수보다 해외정세에 밝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당시 선진적인 관료들의 의식은 중국의 위기의식에 미치지 못했다.
조선이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대책으로 내수외양을 말하지만 의례적이었다. 외부 문제는 정서적으로 청나라에 의존한 바 컸고, 내부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1862년은 ‘임술민란’이라 하여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빈발한 해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진주농민항쟁이었다. 조정에서는 사태수습과 진상조사를 위해 박규수를 안핵사로 임명했다.
▲ 박규수 초상(실학박물관 소장)
박규수는 항쟁 원인이 된 환곡 부정 실태, 항쟁 관련자 등을 보고하고, 환곡제도 개혁안을 올렸다. 박규수는 양반 사족층의 책임을 강조했는데, 영남 유생들이 이에 반발했다. 또한 그의 조사가 지나치게 오래 걸리고 처분이 너무 가볍다는 반발이 있었다.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듬해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했다(1863). 박규수는 고위 관리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60세에 평안 감사로 부임했다(1866). 그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침투했다. 인도적 대처에도 불구하고 계속 횡포를 부리자, 마침내 화공(火攻)으로 셔먼호를 격퇴시켰다.
서양세력과의 첫 충돌을 성공적으로 대처했지만, 그는 쇄국론자가 아니었다. 유교문명의 자신감을 기반으로 하여 외국과 평화롭게 교류하는 것을 기대했다. 미국을 영토적 야심이 없는 공정한 나라로 평가했다. 일본과도 호칭 문제 등에 구애받지 말고 무력충돌 없이 원만한 수교를 맺도록 흥선대원군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가 기대한 자주적 개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1877년, 나이 70세인 그는 눈을 감았다. 김윤식(1835∼1922), 김옥균(1851∼1894), 유길준(1856∼1914) 등 그의 집안을 드나들었던 젊은이들이 후일 개화운동을 주도했기에, 그를 북학과 개화사상을 연결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내우외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에 그가 경륜을 발휘하지 못하고 떠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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