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세계에서 물리적으로만 이렇지 않고, 사상과 정신의 세계에서도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자유, 사랑, 정의, 진리, 마음, 평등, 통일 등 모두가 대타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출발 근거와 기초도 이유와 목적처럼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부모나 뿌리나 열매같은 자기 밖의 남에게서 받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의존자들이며 우연유들이다. 따라서 궁극에 가서 논리적으로는 필연유의 자존자 존재가 반드시 불가피하게 있어야만 한다. 이름이야 ‘신’이라고 하든지, ‘무한자’나 ‘무극’이라고 부르든, ‘조물주’라고 하든지….
그런데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주객이 뒤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민을 위한 국가라기보다 국가를 위한 국민으로 봉사 아닌 혹사를 강요 당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사실 국법도 국민을 위하여 있는 것인데, 국법을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듯 강요하는 목소리가 더 우렁찬 나라와 시대도 있다.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하여, 만물의 동작과 행위 역시 인간사회의 마을이나 가정처럼 특히, 나라들 간의 끝없는 회의를 거듭하는 국제연합도 들여다보면 모두가 서로 의존적이다. 마치,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날개와 깃털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공기라는 비상여건이 있기 때문이며,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도 지느러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물이라는 수영가능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물건을 볼 수 있는 것은 물건의 모양과 색채와 우리 눈의 시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눈의 시력이 다른 물건을 볼 수 있게 밝음이라는 가시여건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지력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하나 더하기 하나 하면 둘(1+1=2)이라는 수학적 논리를 깨닫는 것도, 나아가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깨닫는 것도, 선과 악을 인식하고 식별하는 것도, 지능적 ‘밝음’ 곧, ‘조명(illuminatio)’이라는 가시여건 덕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 자체와 그 주변에 대한 인식은 최우선의 지식이다. 특히, 국민과 국가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대기업이나 정권이 사회혁명의 씨를 뿌리는 것도 자기 존재의 천부적 목적 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도, 고독은 그래도 극복하기가 쉬우나, 고립은 견디기 더 어려운 것이다. 모두가 서로 의존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최근 어떤 싸움꾼이 너무나 심심하여(?), ‘전쟁을 구걸하는(begging for war)’ 지경이라고, 비꼬듯 공격적 발언을 한 UN의 모 대사의 표현은 목적의식 망각의 소치라 하겠다.
따라서 말하기 쉬운 평화도 합당한 대상이 필요하듯, 전쟁도 걸맞은 상대국이 있어야 한다. 중·소의 후원(?)으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양손에 들고 호소하는 북한의 눈에는 비핵화 조치로 맨주먹이 된 남한만이 만만하게 보이겠지만,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열강들은 핵무장에 있어서 북한보다 훨씬 대선배라는 점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만도 없다.
더구나 핵보유국 공인이 체제유지나 국방이나, 국가 경제발전이나 조국통일에 백해무익하며, 오히려 장애물이 됨을 알아야 한다. 동서독이 핵무기가 있어서 통일하지 않았고, 구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와해되지 않았으며, 미국이 핵무기 덕택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과 중국이 핵무기 개발, 보유에 힘쓰지 않았다면 지금쯤 국민소득이 20만불 이상씩 되어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가꾸는데 지금보다 훨씬 더 기여하고 있을 것이며, 저개발국의 기아퇴치로 만민의 존경과 찬미를 받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