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 함성’ 울려퍼졌던 장터… 21세기형 ‘상생장터’ 진화
주소판이 알려준 곳으로 눈을 돌리니 발안천 다리를 따라 수십 개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곳은 화성시 발안천변에 있는 화성발안만세시장이다.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민족 최고의 장터에서 항일 만세운동의 중심지로, 세월이 흘러 쇠퇴기를 맞았던 발안만세시장은 요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역사는 물론 사람과 문화, 책의 향기가 피어나며 사람이 다시 몰려드는 시장이 그것이다. 화성발안만세시장이 새롭게 펼쳐나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봤다.
■ 만세 운동의 상징적인 장터… 역사적 이야기 ‘풍성’
일제 강점기 시절 만세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이곳은 수원과 오산을 걸어서 오가던 시절 농산물과 공산품 등 물물교환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장터 중 하나였다. 이후에도 북적북적한 장터를 형성하고, 1990년대 말에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곳 역시 변화를 맞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장 주변에 하나 둘 대형마트가 입점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시장에 몰리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하지만, 2013년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에서 지원하는 문화관광형 시장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시장에 소프트웨어 콘텐츠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바로 주민, 관광객과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이다. 시장을 변화시키려는 상인들과 상인회, 지역민들은 힘을 합쳤다.
시장 고객지원센터에서는 어린이, 다문화가정 등을 위한 한글교실과 인문학 강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멋스러운 분위기의 발안만세시장 고객지원센터는 1층 공연장과 주차장, 2층 갤러리터 만세카페, 3층 사무실, 4층 교육장 옥상 어벤져스 4D체험장 등이 설치돼 있다. 상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인 셈이다. 만세 카페는 화성시 예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지역민들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 평일엔 바리스타와 캘리그래피 교육도 진행한다. 젊은 여성들과 예술인들이 찾아오니 시장이 활기를 찾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사업을 통해 고객 유입은 35%, 매출은 평균 25% 상승했다.
■ 시골 장터와 현대적 감각의 점포… 다문화·예술도 공존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발안만세시장은 여전히 화성시 서남부 5개 읍ㆍ면의 생활중심 터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260여 곳의 점포가 있는 상설시장과 매달 5ㆍ10일 오일장이 열려 전통 장터의 느낌과 현대적인 시장의 모습을 모두 갖췄다. 5일 장날이면 번화가 같은 시장은 농촌냄새 나는 장터로 변한다. 각양각색의 물건 파는 사람과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사들이려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흥겹다. 농촌 거주자들에게 필요한 각종 기구부터 세련된 간판의 귀금속 가게, 옷 가게, 다양한 맛집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주변에 다문화가정과 이주노동자들이 많다 보니 글로벌 마켓의 역할도 한다. 주말엔 장을 보러오는 사람들의 80%가 다문화가정이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네팔, 인도 등 국적도 다양하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 만큼 세계 각국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외국 식당도 많다. 역사와 예술, 문화, 글로벌, 장터.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섯 단어는 기막힌 조합을 이루며 화성발안만세시장을 지탱하고 있다.
정자연기자
이효정 화성발안만세시장 상인회장
2011년부터 상인회장을 맡은 이효정 회장은 장사꾼 같지 않다. 백발의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 온화한 표정과 말투는 시인 같기도 하다. 30여 년째 발안만세시장에서 자리 잡은 이 회장은 시장을 자신처럼 바꿔나가고 있다. 역사가 있던 시장에 이야기를 다시 입히고, 생동감을 넣어 찾고 싶은 시장으로 다시 만드는 중이다.
기반 시설이 하나 없던 시장에 하나 둘 시설을 구축한 것도 이러한 열정에서 시작됐다. 그는 “시장상인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기다리지 말고 찾아서 하자는 데 모두 뜻이 맞았다”면서 “시장만이 가진 매력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찾는 시장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회장직에 오른 후 그는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에 도전해 시장에 기반시설이 하나씩 채워지도록 했다. 이 회장을 비롯해 시장상인회 임원들은 화성발안만세시장만의 역사와 매력, 상인회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알렸고 한 차례 탈락 이후 드디어 사업에 발탁돼 지원받게 됐다.
이 회장은 “무엇보다 지역시장인 만큼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그들과 마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데 힘을 실었다”면서 “단순히 판매를 하고, 매출을 올리는 시장이 아니라 지역민의 삶의 터전이자 공간으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민과 다문화가정이 많은 점을 활용해 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시장 고객지원센터에서 열고,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오히려 행정의 손길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곳에 시장상인회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중ㆍ주말에는 외국인과 소통을 위해 외국인ㆍ다문화와 관련된 센터가 근무한다. 또 치안을 우려하는 주민을 위해 자체적으로 사각지대에 CCTV를 설치해 우려를 덜었고, 외국인과 함께하는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했다.
상인회는 상인, 주민 간의 소통이 돈을 버는 길이라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다. 그는 “시장 상인들은 물론 주민과도 소통하고, 서로 이해해야 단합이 잘 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시장 상인회와 상인, 지역 주민이 함께 화성발안만세시장의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시장에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소통의 시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그는 “화성발안만세시장은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을 깨는 시장, 다양한 문화와 이야기가 있는 시장”이라며 “전통시장 구성원들이 노력할 테니 지자체와 국가에서 제도적 지원, 지역주민들과 많은 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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