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위해 죽음으로 맞섰던 의병장
이후 양평을 주근거지로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에서 투쟁했다.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소장수를 가장하고 장날을 이용해 격문을 돌리며 200명이 넘는 장정을 규합했다.
양평 용문산을 근거지로 양주, 이천, 지평 등지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의병은 한때 4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해 세력을 강화했다. 민긍호 의병을 비롯한 주변지역 의진과 연합전열을 구축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1907년 8월, 서울에 인접한 양평 일대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일제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이에 의병과 일본군 사이 수차례 대소 전투가 벌어졌다.
권득수는 결전에 앞서 의병들에게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라며 최후의 결전을 독려했다. 31세 나이로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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