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복마전(伏魔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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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전’이란 시자안(施子安)의 무협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복마지전’(伏魔之殿)에서 따온 ‘마귀의 거처’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북송 인종(仁宗, 1010~1063) 때를 설정하여 쓴 이 소설은 나라에 횡행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 용호산의 수도사 장진인(張眞人)을 만나러 갔던 사절 홍신(洪信)이 객기를 부리다가 ‘복마지전’에 봉인되어 있던 108 마왕을 풀어줌으로 나라에 전염병보다 더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실낙원>을 쓴 밀톤(John Milton)은 그의 글 안에 이 복마전과 흡사한 판데모니움(Pandemonium)이라는 단어를 ‘마귀들의 소굴’ 또는 ‘마법에 걸린 지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복마전’을 ‘악한 마귀들이 거처하거나 무리 지어 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지’,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곳’, ‘썩어빠진 사회’ 등 불의한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는 단체나 무리와 사회를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이런 시대를 가리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마태복음 11:16-17)라고 했다. 이웃의 아픔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악한 세대라는 말이다.

 

로마가 식민 지배하던 1세기 전후 팔레스타인의 유대와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은 로마와 그들을 대신하여 대리 통치하던 헤롯 왕가,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로부터 3중의 착취를 당하고 살았다. 특히 로마는 그들의 정책에 저항하는 식민지를 테러에 준하는 폭력으로 다스렸는데, 예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와 가버나움 같은 곳에서는 로마 군대가 집과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대와 갈릴리의 통치자인 헤롯 가문은 로마를 위해 티베리아스를 그들의 행정 지배를 위해 세포리스를 건축했으며, 도시가 없던 시골 지역에 로마식 왕궁과 원형경기장과 신전들을 지으면서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빨아들였다. 거기다 성전 지도자들은 모세 전통과 계약전통에 따른 헌물과 십일조 등의 성전세를 어김없이 거두어들이는 상황에서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은 고통으로 슬퍼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유다와 갈릴리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아픔을 보살피기는커녕 자기들의 배만 불리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는 그 세대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 치지 않는 세대”라고 본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썩어빠진 복마전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런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지와 같은 그 사회를 가리켜 ‘강도의 소굴’(누가복음 19:46)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런 세대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

 

핵미사일이 머리 위를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테러에 준하는 강대국의 폭력이 난무해도 힘없는 이 나라는 눈치 보며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도 국민을 소모품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정치권은 촛불 열기의 한 모퉁이 그늘에서 권모와 술수와 음모를 꾸며대기에 바쁘고, 소비자를 호구로만 여기는 대기업의 갑질과 횡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영화라도 찍듯이 동료를 폭행했던 어린 여중생들의 조직폭력배 같은 행동과 자기보다 더 어린 아이를 유괴 살해했던 여고생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잠시 분노했다가도 이내 남의 일 대하듯 치부해버리는 이 무감각한 세대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마법에 걸린 지옥 같은 복마전이 아닐까? 폭행하고 폭행당하는 세대, 비난하고 비난받는 세대, 테러가 끊이지 않는 복마전 세대에서 나는 과연 안전한가? 그리고 나는 이 세대와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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