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군번 1번’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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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의 군번 1번은 이형근 예비역 대장이다. 그는 1942년 일본 육사를 졸업했고, 1946년 미군정청에 의해 육군 대위로 임관되면서 군번 1번을 부여받았다. 이때 이형근보다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이 군번 1번을 차지하려고 무던 노력을 쏟았다. 이형근에게 1번을 빼앗기자 크게 반발하였으나 미군정청은 그대로 묵살해 두 사람의 감정은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50년 6ㆍ25가 일어났다.

 

이형근은 제 2사단장으로, 그리고 채병덕은 군번 1번을 빼앗겼으나 참모총장이 되어 북한 인민군의 남침에 맞닥뜨리게 된다. 채병덕은 전략적 요지인 의정부를 포기하지 말고 사수할 것을 이형근 제2사단장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형근은 탱크 하나 없이 4.2인치 박격포와 무반동총을 갖고 의정부를 사수하라는 것은 자멸이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2사단에 앞서 7사단도 의정부를 사수하기 위해 싸웠지만, 탱크를 앞세워 물밀듯 내려오는 적 앞에 힘없이 무너진 상태였고 전황은 더욱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형근은 채병덕에게 의정부에서 병력을 잃지 말고 한강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문제로 두 장군은 싸움을 벌였다. 결국 채병덕은 이형근을 사단장직에서 해임해버리고, 최창언 대령으로 하여금 의정부 사수를 명령했으나, 이형근의 판단대로 많은 병력만 잃고 후퇴하고 말았다. ‘군번 1번’의 갈등이 결국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터에서까지 작용하는 것일까?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원균은 치열한 라이벌이었다. 한 번은 전라좌수영 함대가 주축이 되어 승리를 거두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릴 때 원균은 자신도 함께 올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공동으로 장계 올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다. 그래서 이순신이 삼군 수군통제사로 승진하자 원균의 반발이 커졌고 할 수 없이 원균을 충청병사로 발령, 두 사람을 멀리 떼어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휘부의 갈등은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를 가져왔다.

 

선조임금은 그해 이순신으로 하여금 “왜적이 몰려있는 부산진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나타날테니 공격하여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6ㆍ25때 의정부 전투에서 이형근이 판단했던 것처럼 ‘부산진 공격’은 적의 간계에 빠지는 것이고 병력을 잃는다며 출병을 거부했다.

 

화가 난 선조는 어명을 거부한 죄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옥에 가두었으며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했다. 그러나 결국 원균은 이순신의 판단대로 왜군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용감히 싸웠으나 참패를 당하고, 많은 병력과 함선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원균 자신도 전사했으며 외아들 역시 함께 전사했는데 이것이 칠천량 해전이다.

 

그런데 시대가 흘러 21세기가 되었는데 되풀이돼서는 안 될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송영무 국방부장관과 문정인 안보특보 사이에 북한 핵문제와 군사전력을 둘러싸고 마찰이 빚어지는가 하면, 청와대가 국방장관에게 ‘엄중주의조치’하는 경고까지 나왔다.

이 뉴스를 보는 순간 기뻐할 사람은 북한의 김정은 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전술핵 배치를 하느냐를 둘러싸고도 엇박자가 빚어져 국민들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했다. 정말 무엇이 진실이고, 또 안보의 정답은 무엇인가? 제발 국민을 불안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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