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단상] 근로가 아닌 ‘노동’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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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신호를 의미하는 메이데이(MayDay)는 1923년 영국의 한 무선사가 착안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항공, 선박 등에서 위기상황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노동절도 영어로 메이데이(May Day)이다.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지만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등 노동에 대한 합법적인 대우를 요구했던 첫 행사였다.

 

제발 살려달라는 구조 신호와 노동절의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켜달라는 절실함이 닮았다. 기업소득은 늘어나는데 노동소득은 줄어들면서 양극화는 심화하고 있다. 벌어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노동자로 살아가는 국민의 삶은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23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권리찾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동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노동을 존중하고, 노동자가 동반자적 관계라는 인식이 마련되어야 제대로 된 노동정책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근로’는 부지런히 일한다는 의미로,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로 설명되어 있다. 노동은 동등한 위치에서의 능동적인 행위를 일컫지만, 근로는 부지런하다는 뜻을 강조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사용자에게 종속되는 개념이다. 즉 ‘노동’과 ‘노동자’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률은 모순되어 있다. 이미 ‘고용노동부’, ‘노동위원회’, ‘노동조합’이라고 부르면서 법률에서는 ‘근로’를 사용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이지, 국제근로기구로 표현하지 않는다. 국제노동기구와 세계 입법례에서 ‘근로’라는 용어는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자문화권에서도 중국, 대만, 일본 노동법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강희원, ‘노동헌법’)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노동’은 근대 초기 일본에서 ‘labor’의 번역어로 채택한 말로, 19세기 말부터 우리말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당시에 ‘노동’은 ‘근로’와 구분되어 쓰였다고 한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을 함’이라는 평가의 뜻이 담긴 반면, ‘노동’은 ‘육체나 정신의 힘을 써 일을 함’이라는 평가 중립적인 뜻이었다.

 

1923년 시작된 노동절 행사는 이승만 정권에서 3월10일로 변경됐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노동자의 날을 근로자의 날로 부르게 했다. 노동을 이념적 언어로 불온시하고, ‘부지런한 모범 근로자’ 양성이 목적이었던 재벌중심 경제의 상징적 조치다.

 

근로뿐만 아니라 ‘사용자’라는 법률안의 표현도 모순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물건이 필요하여 소용되는 곳에 쓸 때 사용이라고 표현한다.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은 봉건적 발상이다. 노동현장에서 산재사고ㆍ임금체불ㆍ부당노동행위 등과 같은 부끄러운 일들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식의 전환이 바람직한 노동정책을 견인한다.

 

제헌헌법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이익을 공유하는 이익균점권을 보장했었다. 노동을 존중하고, 노동자와 자본가를 동등한 위치로 규정하면서 상생을 모색한 것이다. 근로와 사용자로 ‘갑’과 ‘을’을 구분한다면, 상생정책이 나올 수 없다.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의 날로, 모든 법률안의 근로를 노동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법률안들의 명칭은 근로기준법은 노동기준법으로, 근로복지기본법은 노동복지기본법 등으로 수정하고, 내용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노동자로, 근로시간과 근로능력, 근로계약서와 근로소득세 등은 각각 노동시간과 노동능력, 노동계약서와 노동소득세로 법체계의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개헌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권 사항은 헌법 제32조와 제33조에서 근로 개념을 노동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을 노동자로 높여야 한다.

 

박광온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수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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