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배움이 상식이 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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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찰 대학교 학생 두 명이 우연히 목격한 납치 사건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범인을 제압하는 호신술과 수사 방법들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먹혀들어갈 때마다 쾌재를 불러대는 그들에게 학교는 ‘쓸데없는 것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는 확신과 신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현실의 학칙은 배운 대로 행했던 그들의 모든 행동을 ‘폭행 범죄’와 ‘불명예 선례’로 규정하여 징계함으로 교훈의 하나였던 ‘정의(正義)’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영화였다.

 

공자(孔子, BC 551~479)는 논어 첫머리에서 “배우고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였고, 1천700여 년 후의 주자(朱子, 1130~1200)는 이것을 “이미 배우고 또 그것을 계속 익힌다면 배운 것이 익숙해져서 마음 가운데 희열이 된다(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熱而中心喜悅)”라고 주석하였다. 배움의 기쁨을 회화(誨化)하는 극치의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10월에 발표되는 노벨상 수상자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렵지 않게 연상하는 단어가 ‘유대인’이다. 세계 인구의 0.25%인 1천400여만 명에 불과한 유대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전체 수상자의 30%인 184명으로 압도적이다. 2017년 올해도 단체상이 결정된 평화상 외 11명의 수상자 중에 어김없이 3.6%가 넘는 3명이 수상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200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던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학의 석좌 교수인 데이비드 그로스(David Jonathan Gross)는 “교육을 중시하고 학자를 존경하는 오랜 유대 전통이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하는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유대인이 노벨상을 압도적으로 수상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교육의 중시와 학자를 존경하는 전통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교육의 질적 중요성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은 하루 일상인 “집에 앉아 있을 때에나 길을 갈 때에나 누워 있을 때에나 일어날 때”(신명기 6:7)를 통해 가르치고 생활화하는 쉐마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그들에게 ‘쉐마(the Shema)’란 야훼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말씀을 듣고 배운 대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율법의 근원이자 신앙의 대상인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그 고백을 기초로 배우고 익혀 야훼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는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쉐마 교육은 유대인들이 유대전쟁 중인 AD 70년 티투스(Titus)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후 2천여 년간 세계 각처를 떠돌면서도 지켜온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정신을 잃지 않고 지켜온 것이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물론 토론을 중시하는 ‘하브루타(Havruta)’ 교육 방법의 독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다지만, 이 역시도 배운 것을 실천하게 하는 쉐마 정신을 빼놓고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배움이 배움으로 끝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사회 각 부분에서 교육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백년지계교육(百年之計敎育)에 대한 경고로 여겨진다. 사회적 신뢰와 보편적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정당하게 인정받는 상식적인 사회가 그립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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