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풀뿌리 기초단체와 정당공천제

▲
1970년대 K씨가 충남도지사로 부임했다. 경상도 출신인 그는 부임 다음날 아침, 지사 관사에서 나와 동네 목욕탕에 갔다. 그러나 그는 관사로 돌아올 때 길을 잃어 엉뚱한 곳을 헤맸다. 할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서야 관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자기 관사도 못 찾을 만큼 그 지역에 어두웠던 도지사.

 

지방자치가 시행되지 않았던 때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느 지방을 잘 아느냐, 모르느냐에 상관없이 중앙정부에서 도지사, 시장, 군수를 마음대로 임명했던 것. 그런데 지금은 지방의 뒷골목까지 잘 아는 것은 물론 중앙 정치무대도 잘 알아야 지방자치단체장에 오를 수 있다. 정당의 공천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시ㆍ군ㆍ구 기초자치단체장 선거는 이 때문에 지역출신 국회의원에 대한 공천헌금 등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몇 년전 영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구청장 공천을 희망하는 지망생에게 지역출신 국회의원이 충성서약을 요구하여 말썽이 됐었는데 그내용이 △C구청장이 되면 P의원의 국회의원 총선을 책임지고 치룰 것 △의원 사무실 운영을 책임질 것 △구정에 관해 주1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하고 의원의 지시가 있으면 시행할 것 △의원의 사전허락 없이 구청장의 개인적 사조직을 하지말 것 등 이쯤되면 기초자치단체장은 출신 의원의 개인적인 집사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공천대가로 수억원의 금품을 요구 했다가 이를 거절하여 탈락한 경우도 있다.

사실 불법적인‘정치헌금’은 정치개혁의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으나 기초단체의 정당공천제도를 개선하지 않고는 피할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다보니 기초자치단체장들은 당선 되자마자 의원에 대한 충성이행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며, 기초의원들은 의원의 지역구 행사가 있으면 의회를 열었어도 현장으로 불려가 의석은 텅비어 버리기 일쑤다. 오죽했으면 어느 지방에서는 시의원들의 세금낭비에 대한 반환운동을 벌이기 까지 했을까.

 

지방 ‘소통령’이라고 불릴만큼 지역에서의 권한이 막강한 기초단체장들의 계속되는 비리도 많은 정치비용이 드는 ‘정당공천제’와 무관치 않다.

 

민선 4기의 경우 기초단체장 230명 가운데 15%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비리로 도중하차 해야만 했다. 심지어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래 취임한 군수중에 한번도 임기를 채운 사람이 없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의 정당공천제배제를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제기되었으나 아직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쓰레기 처리를 비롯한 환경문제, 교통문제 등 주민생활서비스가 중심이 되는 기초자치단체는 순수한 주민의사가 집합되는 곳이지 왜 여기에 정당의 간판이 필요한가 하는 주장이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 뿐만아니라 평화롭게 살아오던 마을이 군수선거로 패가 갈라지고 분란이 발생하는 일도 없을 것 아니냐는 소리도 높다.

 

따라서 연방제에 준하는 분권국가를 목표로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추진하는 정부 입장에서, 기초단체장만은 정당공천제도를 손질해야 정치개혁의 빛을 발휘할 것이다.

 

정당공천제가 있는 한 아무리 경선제도를 강화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해도 현실적으로 지역국회의원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번 개헌을 계기로 정당공천제배제를 적극 추진했으면 싶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