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양절에 제사 지내는 풍습을 살려 23년 전부터 장기를 기증하여 남을 살리고 떠났거나 나라에 헌신한 순직 군인 경찰 소방관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천도한다. 천도(薦度)는 생전 지은 업을 소멸하여 좋은 곳에 나기를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다.
지난 10월28일이 중양절이었는데 올해는 특별한 분 10위(位)를 대웅전에 모셨다. 박인기 김봉교 전희택 김동원 홍명집 이장관 조영달 한효준 박금천 강원기 김만석. 이분들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개전 초기 남양주 불암산에서 북한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육사 1기생이다.
임관 한 달 여를 앞둔 생도 신분으로 후퇴하지 않고 불암산을 은신처 삼아 북한군 보급대와 무기고를 공격하고 아군 포로와 민간인 구출 작전을 펼치다 전사했다. 상부로부터 후퇴 명령이 떨어져 철수할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적진에 남아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있는 불암산과 산 내 암자인 석천암스님들이 은신처와 먹을 것을 제공하며 이들을 도와 그 인연이 남다르다. 필자가 1970년대 초반 불암사에 부임할 당시까지 기둥 곳곳에 탄환 자국이 남아있어 치열했던 전투를 실감했던 기억이 있다.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는 이들의 영웅적 전투와 조국애, 애민 정신을 담은 표지판을 세워 불암산과 사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지고 호국이라는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골동품 취급을 받으면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도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나라에서도 이들을 특별히 추모하고 기린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전 세계가 관련된 전쟁이었으니 전사(戰史)에 남을 전투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평범한 산을 은신처 삼아 고작 20여 명이 벌였던 유격대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합리적인 결말인지 모르겠다.
필자 역시 잊고 있다가 불현듯 이들 영가를 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50여 년 전 주지스님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 기억 저 너머 숨어 있다가 나온 듯 그야말로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재학 중인 후배 생도 몇 명이 천도재에 동참해 기뻤다. 1기 선배들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다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육사는 불암사 지척에 있어 훈련하느라 산을 찾는 생도들과 가끔 만난다.
필자는 불교 군종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해 군에 대해 더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다. 육사 1기생 10위를 천도하는 인연을 맺게 돼 빚을 갚은 것처럼 홀가분하면서 한편으로 영광이다. 천도재는 해마다 계속할 것이며 유격대원들의 숨겨진 영웅담도 더 발굴할 계획이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누군가 희생 덕분이다. 전황을 바꾸는 결정적 전투도, 기록으로 남는 공식 전투도 아닌 20여 명에 불과한 유격대원들의 소규모 전투였지만 이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끽하고 있다. 그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사랑이고 호국이다. 뭇 생명을 천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면 스님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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