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있게 뻗은 수형… 사도세자 곁 지키는 500년 고목
이름은 많은 것을 담는다. 이름만 보고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짐작할 수도 있다. 재미있는 건 스스로 이름을 선택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자신의 이름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지만, 평생 불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 개명 건수도 점차 늘어난다고 하는데 지난 2006년 10만 9천명에서 2014년에는 15만 8천 건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좋은 이름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비자나무.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욕설에 붙는 말이 바로 ‘개’자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가 강조하고 싶은 대상 앞에 붙이기도 하지만, 어른 세대는 눈쌀을 찌푸린다. 하물며 이름 앞에 이런 ‘개’자가 붙은 사물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래서인지 천연기념물과 ‘개비자나무’는 동떨어진 단어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만난 것처럼 보였다.
지난 15일 천연기념물 제 504호로 지정된 화성 융릉(隆陵) 개비자나무를 찾았다.
가을 막바지, 평일임에도 화성 융릉은 늦가을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였다. 화성 융릉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건릉에는 정조대왕과 효의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평소에도 방문객이 많다고 한다. 융릉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오른 편에 보이는 작은 한옥 건물이 융릉 재실이다. 재실은 소담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일반 방문객이라면 그냥 지나칠 법하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향나무가 마당 중앙에 있었다. 제사 준비를 해야하는 재실에 빠질 수 없는 나무다. 시선을 더 멀리 옮기니 개비자나무가 보였다.
여주 회양목은 얌전하고 조용한 느낌이었지만 개비자나무는 마당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듯 보였다. 수형부터 그러했다. 대부분 나무는 밑동부터 이어지는 굵은 줄기가 나무의 중심을 이룬다. 개비자나무는 땅에서부터 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져 나온 모양이다. 힘있게 뻗은 수형이 근사하다. 그 주위를 하얀 돌이 감싸고 있어 잘 가꿔진 큰 분재 화분 같은 느낌이다.
개비자나무는 지난 2009년 9월 16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사적 제206호인 융릉 안에 있어 여주 회양목과 마찬가지로 문화재 안에 있는 문화재다.
천연기념물 중 개비자나무는 융릉에 있는 것이 유일하다. 보통 개비자나무는 3m이내로 낮게 자라는데 융릉에 있는 나무는 4m까지 컸다. 줄기 둘레는 80㎝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비자나무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다.
현장에서 만난 문화해설사 김장심씨는 “기록을 찾을 순 없지만 개비자나무는 융릉을 조영하면서 심은 것으로 보고 500살 정도로 수령을 추정한다”며 “역사적·생물학적 가치가 있어 천연기념물이 됐고, 방문객들도 감탄하며 눈여겨 본다”고 말했다.
‘Cephalotaxus koreana Nakai’이라는 학명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이 원산지다. 경기도와 충북 이남에 서식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이니, 어떻게 보면 세계에서도 가장 큰 개비자나무가 아닐까.
비자나무 품종의 가장 특징은 잎모양이다. 이름에서 외형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비자나무가 그렇다. 비자나무는 잎의 모양이 아닐 비(非)와 같다고 하여 ‘비자나무’가 됐다. 비자나무와 개비자나무를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이 잎모양이다. 잎모양이 비자나무처럼 뾰족하지만 그럼에도 그보다 친근하다.
<궁궐의 우리나무>를 쓴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손바닥을 펴서 잎의 끝 부분을 눌러보았을 때 딱딱하여 찌르는 감이 있으면 비자나무, 반대로 찌르지 않고 부드러우면 개비자 나무”라고 설명했다.
개비자나무가 원했는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나무를 가리켜 개비자나무라 이름붙였다. 왜 ‘개’자를 붙인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접두사로 쓰이는 ‘개’는 많은 경우에 쓰인다.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경우에도 ‘개’를 더한다고 한다. 이중 개비자나무가 비자나무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나타내려 한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개비자나무는 갯비자나무로도 불렸다는데,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인 갯가에 많이 자라서 그렇다고 한다. 여기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여하튼 좋지 않은 어감 때문에 개비자나무가 긴 세월동안 속썩었을 것 같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개비자나무는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나무는 아니지만 멋진 수형을 지녀 정원수로 이용되고 열매는 식용으로, 또 급체·마른기침·가래·여성 질환·관절염 등에 약재로 쓰이기도 하는 쓸모 있는 나무인데 말이다. 향후 항암제 개발 가능성이 있는 연구소재로서 고부가가치 산업에 쓰일 것으로 기대받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달콤한 향과 맛을 지닌 나무의 열매, 아름다운 빛으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개비자나무를 보고 사실은 개비자나무가 진짜고 비자나무가 가짜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융릉의 주인인 사도세자는 본인이 사도세자라고 불리는 줄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도세자는 뒤늦게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며 내린 이름이다. 그의 이름에서 주인의 한 많은 인생을 엿볼 수 있다. 영조의 둘째 왕자인 사도세자의 원래 이름은 이선(李)으로 세자였지만 뒤주에서 굶어 죽었다.
이후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받고, 장헌세자(莊獻世子)로 개칭했지만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思悼)는 말 그대로 ‘생각하면서 슬퍼하다’라는 뜻인데 부를수록 서러워지는 이름이다. 사도세자의 행실이 원인이라는 설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것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어쨌든 아비가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비극이다.
사도세자의 묘호도 여러번 바뀌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한지 3년이 되자 수은묘(垂恩墓)였던 묘호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꾸며 존호도 장헌으로 이때 변경했다. 이후 1789년 영우원이 다시 현융원(顯隆園)이 되며 10월 현위치로 이장했다. 110년 후 사도세자는 장종(莊宗)으로 추존, 현재 융릉(隆陵)이 됐다. 같은 해 12월 장종에서 장조(莊祖)로 묘호가 다시 바뀌었다.
정조는 즉위 후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수원화성을 축조한 것뿐만 아니라 이름을 높여 고친 것에도 아들의 깊은 마음이 사무쳐 있다.
융릉 재실 안 마당에서 500년 이상 자리를 지켜온 개비자나무. 개비자나무가 사도세자가 있는 융릉 재실 자리에 있는 특별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둘다 이름에 서러움이 담겨 있어 아주 무관해 보이지는 않았다. 먹먹한 가슴을 안고 자리를 떴다.
손의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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