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무너뜨린 ‘대쪽 선비’ 항일의병 일으켜 민족魂 일깨우다
경기도 포천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익현은 아들의 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아버지 덕분에 소년시절에 특별한 스승을 만나게 됐다. 14세 때 양평에서 강학하고 있던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화서는 최익현이 15세가 되던 해에 ‘면암’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최익현은 10년 가까이 화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열심히 배웠다. 이때 최익현은 ‘임금 사랑을 아비 사랑과 같이 하고[愛君如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과 같이 하라[憂國如家]’라는 화서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화서는 아편전쟁 이후 서양이 곧 무력 침략을 벌일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위정척사론을 주장했다. 처음 위정척사론을 제시한 기정진(奇正鎭)은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국론의 통일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에 화서가 ‘주전’과 ‘주화’라는 이분법에 따라 주전을 강조하는 쇄국 정책의 실천 논리를 제시했다.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게 된 이론적 배경이다.
■ 대원군의 10년 독재 무너뜨려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의 우주론을 가장 잘 이해하였을 뿐 아니라, 대의를 위한 일이라면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직언의 기백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23세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을 거쳐 신창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대변해 충청감사에게 항의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다시 32세에 벼슬에 나갔으나 곧 모친상을 당해 사직했다. 최익현은 36살이 되던 1868년에 ‘시폐 4조를 전달하는 소’를 올려 대원군의 절대 권력에 도전했다. 1873년에는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소’를 올려 “생민들은 어육이 되었다”면서 대원군의 막후정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 상소는 대원군의 10년 독재를 무너뜨렸다. 대원군을 하야시킨 최익현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주도에 유배돼 1875년에야 풀려났다. 이듬해인 1876년,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수교를 강요한다는 소식을 듣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최익현은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소’를 통해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서는 안 될 이유를 들며 이렇게 주장했다. “강화도조약이 받아들여진다면 조선은 머지않아 망할 것이며, 조선의 쌀이 왜적에게 약탈돼 마침내 조선 백성들은 기근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흑산도에 위리 안치됐던 최익현이 유배에서 풀려날 때(1878)는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1년 신사척사 운동이 일어날 때 잠시 선봉에 섰고, 1884년 갑신정변 때 대궐 앞까지 달려갔다가 사태가 수습되자 돌아갔다. 1894년에 일본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는 일이 있자 동대문 밖에서 통곡하고 돌아가는 등의 활동은 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까지 조용하게 생활했다.
■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
최익현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진 1895년에 다시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다.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과 선비의 상투를 자르려는 일본의 만행을 참지 못한 것이다.
최익현은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령을 반대했다. 상투를 끊더라도 강요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자주적인 결단으로 끊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개화 정부는 단발령을 반대하는 최익현의 상투를 잘라 자신들의 의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온갖 협박과 회유도 허사였다. 이 무렵 고종은 면암에게 호조판서, 경기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등의 고위벼슬을 내렸지만 모두 거절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을 토벌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려 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등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국을 시켜 외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국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국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군주가 없는 것이다. 나라가 있고 군주가 없으니 우리 삼천리 국민은 모두 노예이며 신첩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다”
최익현은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에 구금돼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에게 심문을 받고 사흘 만에 풀려나 포천의 고향집으로 압송됐다. 최익현은 서울로 올라와서 상소를 준비하다가 다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번에는 충청도 정산(청양군 목면)으로 강제로 보내졌다. 1905년 12월 6일, 면암은 ‘포고팔도사민’을 전국 유림에 배포했다.
며칠 후 최익현은 고종에게 통한에 사무친 상소를 올렸다.
“폐하에게 지금 국가가 있습니까, 토지가 있습니까, 그리고 인민이 있습니까? 이제 국가도 없고 토지도 없고 인민도 없다면, 두려워할 것은 저항 없이 나라를 물려주는 치욕뿐입니다”
1906년 2월이 되자 최익현은 경기도 진위 등을 돌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대중 집회를 주도하다가 다시 집에 연금됐다. 3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자 최익현은 일본 정부에 주는 글을 발표했다.
“교만한 탐욕은 흥(興)에서 망(亡)으로 옮기는 계단이다. 자고로 남의 나라와 민족을 함부로 침략하고 능욕하다가 끝내 화란을 당하지 않은 예를 보지 못하였다. …이 글은 한갓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귀국을 위함도 될 것이며, 동양 전국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 “조선군 10만은 두렵지 않으나, 최익현 한 사람은 두렵다”
마침내 최익현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1906년 2월 21일 최익현은 미복 차림으로 일본군 헌병대의 감시가 무뎌진 틈을 이용해 전라도 태인현(정읍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익현은 지역의 명망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봉기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유인석은 북쪽에서, 최익현은 남쪽에서 봉기하기로 결의했다.
6월 8일, 최익현의 의병부대 800여 명은 전라도 순창의 적진을 공격하고 담양 태인 정읍 곡성 등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했다. 의병대가 순창에 다시 들어오자 일제는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동원해 순창을 삼면으로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최익현은 의병군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된 병력이 조선군 진위대임을 확인하고 의병군에게 퇴각을 명했다. “우리가 거병한 것은 왜병을 물리치는 것이었지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최익현은 포로가 되고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얼마 후 최익현이 대마도에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통감부에서 두려워한 것은 최익현의 인품과 명망이었다.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토로했다. “조선군 10만은 두렵지 않으나, 진실로 최익현 한 사람은 두렵다”
1907년 1월 1일, 면암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운명했다. 면암의 시신이 부산포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유림과 민중들이 모여들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이때의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일부만 옮겨본다.
“사대부로부터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어린이와 달리는 군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상하되, ‘면암이 죽었구나.’ 하였다. 국초 이래 죽어서 슬퍼함이 이같이 성황을 이룬 적은 없었다고 한다”
면암 최익현의 삶이 치열하다 보니 그의 따뜻한 면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는 중에 고금도에 유배 중이던 이재만에게 위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재만은 최익현을 헐뜯다가 함께 유배된 사람이다.
제자들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말리자 면암은 “비록 그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그에 대한 미움이 없다”라고 했다. 흑산도에서 유배를 살 때 이웃에 유배되어 있던 박우현에게 쌀과 찬을 보내 위문했던 일도 있다. 최익현의 흑산도 유배가 결정되자, 박우현은 그냥 귀양 보내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국청을 열어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이후 박우현은 면암과 절친한 벗이 되었다.
유기일은 화서 이항로와 중암 김평묵 같은 스승과 선배를 헐뜯고 동년배 사이를 이간질하는 못된 일을 많이 하여 김평묵조차 유기일과 관계를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익현이 김평묵에게 편지를 보내 관계를 끊지 말 것을 요청했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포천에 돌아온 최익현은 유기일에게 매를 짊어지게 하고 김평묵을 찾아 화해시켰다. 이처럼 면암 최익현은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인 선비였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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