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구세군 자선냄비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heohy@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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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재난으로 슬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된 도시 빈민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한 종교인이 있었다. 19세기 말의 미국 얘기다.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용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썼다.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미국 남부 샌프란시스코 거리에 이처럼 특이한 물체가 등장한 건 1891년 겨울이었다. 이렇게 보면 드럼통 같고, 저렇게 보면 무슨 그릇 같았다. 그 옆에서 군인들의 정복 비슷한 붉은색 복장을 입은 사내가 종을 들고 흔들며 행인들의 걸음을 붙들었다. 검은색의 큰 쇠솥 안으로 동전들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자선냄비였다. 개신교 교파인 구세군이 연말에 진행하는 거리모금운동의 시작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구세군 사관 조지프 맥피(Joseph McFee)가 주창한 자선냄비는 이후 뉴욕과 워싱턴 등 미국 동부로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선냄비는 시골 마을 곳곳에도 설치됐다. 엽서에도 겨울 풍광으로 등장하게 된다. 마침내는 오 헨리가 쓴 단편소설 ‘크리스마스’에도 익숙한 미국 도시의 겨울 아이콘으로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웃을 돕고자 새벽까지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종교인의 깊은 마음은 아시아 변방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까지 들어온다. 당시 조선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 사관이 명동 한복판에 자선냄비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생활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모금을 시작했다. 바로 1928년 오늘이었다. 시골뜨기가 서울 구경 왔다가 내려가면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던 도시의 대표적인 겨울 풍광이기도 했다.

▶행인들이 옷깃을 꼭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귀가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바야흐로 동장군의 심술이 펼쳐지는 동지섣달이다. 경제 한파로 요즘은 뜸해졌지만, 아무튼 크리스마스트리에 캐럴까지 흘러나오면 곧 한 해가 다 가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게 구세군 자선냄비다. ‘덩그렁’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가던 길을 멈추고 동전 한 닢이라도 넣는 손길이 새삼 아쉬운 계절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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