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40. 분단시대를 극복할 위대한 사상의 탄생을 기다리다

한반도 역사·思想의 뿌리 경기도가 통일한국의 미래 연다

제목 없음-1 사본.jpg
한글학회가 1947년에 펴낸 <큰사전>에는 경기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조선 십 삼 도의 하나. 반도의 중앙에 있는 도이니 동은 강원도, 남은 충청 남북도, 북은 황해도, 서는 황해에 닿음. 이곳은 마한 수백 년의 도읍지요, 고구려와 백제가 패를 다투던 곳으로, 뒤에 신라의 땅이 되고, 고려 현종 때에 경기도라 이르고, 조선 태종 13년에 이 이름을 그대로 정함. 지세는 비교적 평탄하여 천류(川流)가 많이 있는 까닭으로, 전야가 열리고 농산물이 풍부함. 면적 1만 3천296평 방 ㎞, 인구 246만 명”

 

■ 독창적인 사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948년에 남북한이 서로 단독 정부를 세우면서 분단이 고착화됐다. 그러하여 개성이 경기도에 있는 도시였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때가 많다. 분단시대가 빚어낸 서글픈 현실이다.

 

고려 500년 도읍지였던 고도 개성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정치적으로 변방이 된 곳이다. 개성 출신의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은 조선의 독창적인 사상가로 주목을 받았다. 유학의 이기철학을 화담이 독창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살았던 개성이 정치적 변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총서라 할 수 있는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조선 학자의 저서 중에서 유일하게 수록된 것이 서경덕의 <화담집>이다. 퇴계나 율곡의 문집이 아니라 <화담집>을 실은 것은 물론 내용의 독창성 때문이다. 기(氣)철학자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 1803~1877)도 개성 출신이다. 

최한기는 개성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서 살았고, 양반이지만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같은 중인 혹은 평민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1834년에 김정호와 함께 세계의 지구도를 만들었고, 김정호가 그린 <청구도>에 그 내력을 기록해 주었던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이처럼 신분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태도가 독창적인 사상을 배태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경험을 통한 실천을 강조했던 최한기의 저술은 실학과 과학과 인문정신을 충실히 담고 있다. 그의 철학이론을 담고 있는 <기측체의(氣測體義)>는 중국 북경에서 출판돼 중국 인사들에게 널리 읽혔다.

 

■ 경기도의 사상, 안민을 추구하다

경기도에서 빼어난 경세가들이 여럿 배출됐다. 그 가운데 파주 출신의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학자로서 탁월한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사후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서인의 종주가 되었으나 율곡이 숨을 거두기 전까지 정성을 쏟았던 문제는 동서로 분열된 사림을 화합하고 대립하는 정치권을 조정하는 일이었으며, 민생과 국방을 살피는 일이었다. 율곡은 탁월했지만 당대에 이해되지 못했던 불운의 경세가였다.

 

지정학적으로 조선은 국방을 소홀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양반사대부들이 이웃 명나라의 무력에 기대어 자주국방에 소홀한 탓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야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일본과 청나라의 침략을 연거푸 받았으나 조선이 망하지 않았던 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은 이러한 난세를 진심과 헌신으로 헤쳐나간 관리였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을 가졌으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임진왜란 초기에 평안도를 중심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시켜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원과 향교에 ‘서검재(書劍齋)’를 설치하여 유생들을 군사지휘관으로 육성했다. 이러한 공로로 정승에 오르고 사도도체찰사(경상전라충청강원)로서 민생을 돌보며 전쟁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경기도에서 최초로 대동법을 시행(1608)하여 민생안정[安民]을 꾀하는데 주력했다. 선조 광해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나 이웃들이 그가 정승을 지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정도로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아 백성들은 물론 인조의 존경을 받았다. 광명시 소하동에는 인조가 이원익의 청렴한 삶과 고결한 정신을 높이 사 하사한 집 ‘관감당’이 있다.

 

율곡 이이가 구상해 오리 이원익이 시작한 대동법은 잠곡 김육(潛谷 金堉, 1580~1658)이 완성했다. 김육의 헌신과 뚝심이 없었다면 ‘조선 최고의 개혁법’이라 불리는 대동법은 실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김육의 결단은 젊은 시절 정치권에서 밀려났을 때 가평 잠곡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면서 백성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기득권층인 양반사대부들의 온갖 방해를 뚫고 끝내 대동법을 실현한 그를 숙종은 “마음을 다해 나라에 헌신했다”며 칭송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736)과 풍석 서유구(徐有, 1764~1845)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정조의 명을 받아 정약용이 설계한 수원 화성은 위대한 정신이 빚어낸 도시이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물과 같은 존재였다. 물론 이러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자각한 임금은 많지 않다. 아무튼 이러한 정조가 있었기에 박제가, 정약용, 서유구 같은 개혁적인 실학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서유구와 정약용은 여러모로 닮았다. 규장각에서 일했던 것이나 초계문신에 뽑혀 정조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던 사실부터 민생을 구제할 방안을 찾기 위해 힘써 노력하다가 정조가 서거하면서 고난의 긴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것도 동일하다. 18년 동안 유배를 살았던 정약용처럼 서유구도 비슷한 시기 정계에서 밀려나 18년 동안 경기도 광주에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했던 것이다. 정약용 사상의 진수는 ‘1표2서’로 불리는 저술에 들어 있다. 

특히 <경세유표>에는 낡은 조선을 새롭게 만드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책이다.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지도자들이 미륵불에서 얻은 비결이 바로 <경세유표>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에 힘썼던 서유구는 “경서에 뿌리를 두고 역사에 의거한 문장으로 경제 실용의 학문에 정력을 다 바쳤다”는 평가를 들었다. 경세치용에 주력했던 정약용과는 달리 이용후생에 집중하여 농업과 공업을 중심으로 한 실용의 학문에 헌신해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전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추구한 학문의 궁극적 지향은 안민(安民)이다.

 

■ 경기도, 통일과 번영을 여는 기회의 땅

경기도의 사상과 사상가를 살펴보면서 자주 맞닥뜨린 단어는 ‘지리(地利)’였다.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는 문제는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느냐 만큼이나 한 존재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대륙과 해양을 잇는 한반도의 허리이자 서울과 지방 사이에 경기도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가졌기에 경기도는 늘 역사의 중심무대로 활기를 띠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한반도의 근현대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프랑스의 침략전쟁인 병인양요(1866)와 미국의 침략전쟁인 신미양요(1871)를 겪었으나 완강하게 쇄국을 고집하던 조선도 결국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강화도조약(1875)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위협을 받던 조선은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미소의 대립 구도에 말려들면서 국토가 분단된 지도 70년이 넘었다. 이처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존재’로서의 한반도와 서울과 지방의 ‘사이에’ 위치한 경기도는 닮은꼴이다.

 

1934년 식민지 치하, 경기도 경찰국의 감시를 받고 있던 <성서조선>(1927년에 창간되어 1942년에 강제 폐간된 잡지)에 두 편의 글이 실렸다. 하나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발표 당시의 제목: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김교신의 <조선지리 소고>라는 글이다. 함석헌은 한국사를 살피면서 신은 과연 한민족에게 어떤 사명을 주려고 이처럼 거듭 고난을 주시는가라는 고통스런 질문을 던졌다. 반면 김교신은 <조선지리 소고>에서 한반도의 앞날을 이렇게 전망했다.

 

“조선의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 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다. …동양의 온갖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모든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큰 용광로에 달여 낸 엑기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한반도는 방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살기 어려운 땅이지만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무나 활동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경기도의 지정학적 조건을 성찰하면 경기도의 시대적 역할과 사명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