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아침] 수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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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중 몸이 아프거나 근심이 있는 날을 빼면 우리가 평안히 즐겁게 살 수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는다. 죽은 자식을 데려와서 살려달라고 했을 때, 집안에 죽은 사람이 없는 열 집에서 콩을 얻어오면 살려주겠단 석가의 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저마다 근심, 걱정,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셈이다. 앞길이 희미하고 아득할 때, 심신이 괴로울 때 우리는 눈물을 닦아 줄 그 누구를 찾는다. 우리를 구원해 줄 구세주,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성탄절은 예수가 태어난 날로 알려져 기독교권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명절이 됐지만 그 유래는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하는 날, 즉 동지가 지난 첫 일요일인 태양절이다.

성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창조주인 신이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사람이 됐다는 데 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12제자들 중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도 한둘 뿐이었다.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백성은 그가 자신들을 구하러 온 분이라고 믿었으나, 종교지도자들은 눈엣가시로 여겼다. ‘산헤드린(Sanhedrin)’이라는 유대의 의결기관에서 무고한 그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씌워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갔을 때, 군중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제국에 억압받는 자신들을 구해주리라 믿었던 이가 힘없이 잡혔을 때,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혹세무민하는 사기꾼으로 보였기 때문이리라.

 

명문대학도 아닌 지방대 출신의 한 의사가 격려와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치료한 사람들은 건설노동자, 운수업 종사자 등 근로계층으로 부자가 아니었다. 저승사자와 줄다리기하듯 그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를 환자들을 수없이 살려냈다. 자신의 몸도 돌보지 못하며 사신과 맞서는, 겸손하지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 그에게 일반인뿐 아니라 동료의사들도 존경과 지지를 표명했다.

 

지지하는 여론이 비등하면 그 빛에 대응하는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장일치의 판결은 무효라는 자신들의 원칙을 어기고서 예수를 만장일치 유죄로 판결한 ‘산헤드린’의 위원들처럼, 자신은 한 사람의 의사일 뿐이라고 몸을 낮추는 그를 ‘눈엣가시’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며 환호하다가 한순간에 “그를 십자가로!”라고 외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그 의사가 십자가의 길 14처를 묵상하며 따라 걸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는 그 길이 험난하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미리 관에 들어갈 부장품으로 ‘치료했던 환자 명부’를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학생시절 유행했던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를 다시 들으며 만해의 시 ‘비방’을 떠올린다.

“세상은 비방도 많고 시기도 많습니다. 당신에게 비방과 시기가 있을지라도 관심치 마셔요. 비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태양에 흑점이 있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에 대하여는 비방할 것이 없는 그것을 비방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터무니없는 비방이 난무할지라도 그가 수난의 삶을 묵묵히 완수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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