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영웅은 ‘용기’가 아닌 ‘진심’이 만든다

김규태 사회부 차장 kkt@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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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물건인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갈 수 있을까”

기자가 20년 전 군대에 입대했을 때다. 고참들은 “이름은 잊어도 총번은 자동반사로 나와야 한다”, “총은 전쟁에서 너를 구해줄 유일한 친구다” 등등 군인에게 있어 총의 중요성을 항상 인지 시켜주곤 했다. 그렇게 세뇌된 기자는 군인과 총은 ‘바늘과 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군생활에 전념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기자가 가졌던 ‘군인과 총’의 역학 관계를 깨버린 영화 한편을 만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를 배경으로 한 핵소 고지(Hacksaw Ridgeㆍ2016년 작품)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한 채 의무병으로 참전한 데즈먼드 T. 도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무기없이 참전한 도스는 결과적으로 미군이 참패한 이 전투에서 무려 75명에 달하는 동료 병사들을 맨손으로 구했고, 또다시 의무가방 하나만 멘 채 전투에 참전했다가 결국 부상을 당하고 만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행복해야 할 연말에 연이어 비보만 날아든다. 제천 스포츠센터와 광교 신도시 건설현장의 화마(火魔)는 소중한 생명들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아비규환의 순간에도 동료를 먼저 구출시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20대 젊은이가 있었고, 고가 사다리차로 고층에 갇힌 시민들을 대피시킨 업체 대표와 비상구로 탈출을 도운 사우나 이발사,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10여 명의 여성들을 구한 70대 할아버지와 중학생 손자가 있었다.

 

▶핵소 고지 전투에서 동료들의 목숨을 구한 데즈먼드 T. 도스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총을 들지 않은 군인 최초로, 미군 최고의 영예로 불리는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터에서 총 한번 쓰지 않고 영웅이 된, 참으로 아이러니컬 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스는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신념의 ‘용기’를,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진심’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제천 스포츠센터와 광교 신도시 건설현장 화재참사에서 나보다 먼저 타인의 안위를 걱정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나를 버리는 ‘용기’를 택해,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진심’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김규태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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