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한국에 온 孔子 75대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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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의 75대 종손 공샹린(孔祥林) 교수를 지난주 유성에서의 한 학술대회에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

 

그는 인상부터 초상화로 보아온 그의 75대 할아버지 공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비슷했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곡부의 사범대학 교수로 근무하는 그는 공자묘를 비롯한 유네스코에 등재된 공자문화유산을 관리하고 선양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한국에 온 이유 중의 가장 큰 목적도 어떻게 해서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서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과 달리 공자에 대한 제사가 계속되고 있는가를 직접 답사하는데 있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의 공자님과 그 사상에 대해 아주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아주 옛날 백제시대부터 알 수 있습니다. 백제 왕자 융(扶余 隆)이 당나라 황제를 대신해 곡부에 가서 공자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그때의 축문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이 그걸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공샹린 교수는 한국에 유교사상이 오랜 뿌리를 두고 있는 것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공자의 본거지 중국에서는 오히려 공자사상과 공자라는 인물 자체를 부정하는 위기를 맞은 때가 있었다. 1960년대 홍위병을 앞세운 문화혁명이 그것이다.

 

그들은 공자를 비롯한 맹자, 노자 등 중국이 낳은 세계적 선현들을 오히려 공산혁명의 적으로 간주하고 북경의 자금성, 곡부의 공자묘 등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자묘 파괴 임무를 띠고 현지에 도착한 것은 북경사범대학의 학생 홍위병.

 

그들이 정신없이 공자묘 파괴 작업을 벌이며 한창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을 때 중국의 국무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로부터 긴급명령이 떨어 졌다. 파괴를 멈추고 즉시 북경으로 귀환하라는 것. 만약 3일만 이 철수명령이 늦었더라면 2500년을 유지해 온 공자의 유적들은 완전히 훼손됐을 것이고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비뚤어진 이념의 광풍은 토네이도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갖는다. 하지만 이런 광풍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지도자의 힘, 바로 저우언라이가 그런 인물이다.

 

그는 중국의 모택동을 도와 공산정권을 세우는 공로를 세워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포로가 되지 않았으며 특히 ‘저우언라이의 여섯 가지 없음의 원칙’은 깊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즉, ①죽어서도 유골을 남기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1976년 사망한 후 매장하지 않고 화장을 하여 황하에 뿌렸다. ②후손을 두지 않는다. ③권력자 행세를 하지 않는다. ④당파에 얽매이지 않는다. ⑤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⑥죽을 때 유언을 남기지 않는다.

 

어쩌면 저우언라이의 이와 같은 원칙은 그 당시 공산당이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공자사상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사실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가 중국 공산정권 수립 후의 상황과 비슷하여 백성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제후들은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는 등 가장 불안정한 시대였는데, 이 때 공자가 가르친 것은 ‘인(仁)으로 다스리고 덕(德)으로 정치를 펴라’는 것이었으며 ‘천하가 한 집의 소유물이 아니다(天下爲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아픈 고비를 겪은 중국이지만 지금 다시 공자문화원을 세계 각국에 설립하고 공자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해 공자의 75대 종손 공샹린 교수는 ‘이제 중국이 경제대국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그들의 정신문화적 정체성이 필요해졌다는 뜻일까?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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