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돌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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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만든 낡은 창고 하나가 시골동네에 서 있다. 별스러울 것 없는 모양새이지만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그마한 갤러리가 기다리고 있다. 맞은 편을 보니 매표소도 있고, 카페도 보인다. 남해의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만난 풍경이다.

 

50년된 이 창고는 남해대교로 이어지기 전 양곡과 비료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섬이라는 특성상 시멘트와 같은 건축자재가 부족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남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청석으로 지은 것이다. 한참의 세월이 지나다보니 창고는 낡았고, 새로운 자재로 새 창고가 지어지면서 돌창고는 창고의 기능을 다한 것이다. 이 공간을 젊은 기획자들이 나서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돌창고는 이제 작가들을 기다리는 공간이 됐다. 인근의 낡은 양옥집 이층은 작가들이 기거하며 작품을 만들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함께 하는 공간이 되었다. 주민들은 돌창고를 지나면서 창고가 만들어진 시절을 회상하고, 새롭게 오는 사람들을 반긴다.

 

만경평야를 끼고 위치한 삼례역 앞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양곡창고가 있다. 70년대에 지은 창고까지 합쳐서 십여 년 전까지 창고로 활용됐으나 전라선 복선화로 역과 선로가 옮겨지면서 창고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지금은 삼례문화예술촌이 자리 잡고 있다. 갤러리와 디자인박물관, 목공방, 책공방과 카페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모인 체험객들이 창고에서 미술품을 감상하고, 목공방과 책공방에서 자신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진한 커피향을 느끼고 있다. 인근의 문화유산까지 어우러져 지역 전체가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면 지역의 정체성이 된다. 개발과 재개발로 끊임없이 건물을 부수고 짓고 하면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것이 별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학교와 직업에 따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니 고향에 대한 기억을 새기는 것도 의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살던 사람이 기억조차 공유하지 못한다면 지나간 날들에 대한 추억은 어디서 채울 수 있을까. 도시화와 산업화가 유독 빠른 곳이 경기도다. 고향이라고 해도 너른 들과 산과 강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자동차 도로가 먼저 생각나겠지만, 그래도 어릴 적은 모습을 회상할 수 있는 곳이 한 곳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기록은 미래의 역사다. 흔적을 남겨놓는 것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된다. 함께 모여 놀고, 부대끼는 일상 하나하나가 역사가 된다.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은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이 모여서 이루어지고, 기억을 보존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조금 낡고 오래된 공간이라도 거기에 우리 삶의 흔적을 반영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흔적이라도 남겨두는 것이 어떨까. 우리의 할아버지가 살아온 흔적이고 아버지의 흔적이고, 이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공간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그 곳을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은 남겨두는 것이 어떨까.

 

돌창고의 외형은 그대로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으면서 쓰임새를 다르게 해서 새로운 존재감을 만들었다. 동네 어르신은 돌창고를 지나면서 젊은 날 이 공간을 짓기 위해 뒷산에서 돌을 떼고, 지고 온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는다.

낡은 건물은 허물어 버리고 새로 잘 지으라는 핀잔같은 참견은 어디로 간데없고 돌창고에 얽힌 기억을 다시 풀어놓고 간다. 돌창고 안에는 예전 어느 날 기록해 두었을 듯한 비료 몇 포대, 쌀 몇 가마가 적힌 상황판이 아직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마룻대에 적힌 상량문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공간이 남으면 기억도 남는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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