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문왕은 당나귀 귀를 가졌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왕의 복건을 만드는 복두장(頭匠)뿐이었다.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복두장이는 입이 근질거려 미칠 것 같았다. 죽을 때야 그는 도림사 대나무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화가 나 대숲을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게 했다. 바람이 불자 산수유 나뭇가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들렸다. “임금님 귀는 길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얘기다.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유래한 ‘대나무숲’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속내를 털어놓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상에서 익명으로 소통하는 게시판으로, 2012년 출판업계 익명 게시판에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이후 ‘방송사 옆 대나무 숲’ ‘여의도 옆 대나무숲’ ‘시댁 옆 대나무숲’ 등 각 분야에 유사한 이름이 속속 등장했다. 대나무숲은 특히 대학에서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대나무숲은 초기에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소통의 장 역할을 했으나 점차 사회 현안에 대한 토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장으로 확장됐다.
대학의 대나무숲은 대학생들의 고민이나 비밀을 털어놓는 공간이다. 최근 대학가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 폭로는 주로 대나무숲을 통해 나왔다. 이용자가 많고, 피해자들이 그곳에 댓글을 달면서 폭발력이 커졌다. 이달 초 서울 명지전문대 대나무숲에 연극영상학과 교수들이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폭로 글이 이어져 해당 과 남성 교수 5명이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중순엔 한국외국어대 대나무숲에 한 교수의 성폭력 폭로 글이 올라와 학교가 진상 파악에 나서자, 해당 교수가 자살한 사건도 있다. 지난 22일엔 이화여대 음대 관현악과 교수가 학생 수십명을 성추행해 왔다는 글이 대나무숲에 올라왔다.
주로 익명 폭로 글이 올라오다 보니 가해자 신원을 놓고 각종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엉뚱한 사람이 가해자로 지목될 위험도 생겼다. 미투 글 때문에 운영자들이 명예훼손 당사자로 연루되는 일이 잦아지고, 올라온 글마다 진위 논쟁이 벌어지자 대학 게시판 운영자들이 더 이상 ‘익명 미투’ 제보 글을 게시하지 않거나 가려서 올리겠다는 뜻을 잇따라 밝히고 있다. 내용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제보는 올리지 않겠다며 ‘자체 검열’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대학생들은 익명 소통 창구로서의 역할을 저버렸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래저래 대나무숲은 시끌시끌, 바람 잘 날이 없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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