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으로 3·1 만세 삼창 이끌다
1919년 2월, 박희도의 권유로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선생은 2월27일 낮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고, 3월1일 오후 2시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에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기독신보>, <신생명> 등 기독교계 언론을 통해 언론 계몽활동에 전념하다가, 1925년 4월 <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