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정확성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불명예스런 리콜사태가 벌어졌을까? 이에 대해 영국의 권위있는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도요타 경영체제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도요타 이사는 총 29명인데 모두가 도요타에서 수십 년 동안 충성스럽게 근무하다 승진한 일본인들이라는 것이다. 외국인 이사는 물론 여성과 사외이사도 없었으며 이미 1년 전부터 가속페달 문제가 제기됐음에도 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사회 구성에 다양성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말하자면 일본인들의 의식에 깔려 있는 순혈주의(純血主義)를 꼬집은 것이다. 일본의 이와 같은 순혈주의는 이민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시리아와 아프리카 등 분쟁지역에서 2016년 일본에 망명을 신청한 사람이 1만901명이나 되었는데 겨우 28명만 받아들이는 인색함을 보여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 역시 20년 이상을 기다려도 영주권이 주어지지 않을 만큼 이민정책은 제로에 가깝다. 심지어 북한이 붕괴되면 많은 탈북민들이 일본 해안에 밀려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본이다.
요즘 총수 일가의 갑질행태가 전국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대한항공 경영체계 역시 일본 도요타의 이사회 전철과 비슷하다. 아버지가 회장, 장남이 사장, 땅콩회항의 말썽을 빚었던 장녀가 부사장, 그리고 물컵파문을 일으킨 차녀는 전무, 이사진 구성도 충직한 자기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순혈주의 경영체계는 고도의 기업윤리를 가정의 부엌 수준에 머물게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그들의 은밀한 부엌에 들어오는 외부 사람을 꺼리며, ‘가사 도우미’ 정도로 인식한다.
뒤늦게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한다며 사내에서 부회장을 발탁했지만 일본 도요타가 사내에서 이사를 발탁하는 것과 비슷하며, 오너의 장남이 사장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부회장 자리가 얼마만큼 전문경영인의 역할이 가능할까도 의문이다.
이처럼 외부와 벽을 쌓고, 섞여 사는 ‘융합의 힘’을 거부하는 병폐는 대한항공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장애인 시설이 이웃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며 그럴듯한 슬로건을 내걸고 구청 마당에 몰려가 집단행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같은 학군에 배정되는 것을 반대하는 민원이 제기되는 것도 그렇다. 왜 우리는 ‘섞어 사는 융합’에 익숙하지 않고 ‘우리끼리의 순혈주의’에 탐닉하는가?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같은 종교가 아니면 얼굴을 돌리고 같은 종교라도 교파가 다르면 이단 취급하는 우리 풍토다.
교육계는 A대학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어야 하고, 법조계는 B대학 출신들이, 예술계는 C대학 출신들이… 하는 식의 학벌주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 편가르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허물어야 할 벽이다. ‘미투운동’이 우리의 성(性) 문화를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듯이 이번 대한항공 문제도 융합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식에 어떤 경종이 되었으면 싶다.
변평섭 前 세종시 정무부시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