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민주화 가시밭길 학생이 주인되는 교육
도성훈 당선인은 1985년 2월 인천 성헌고등학교에서 재단의 파행적 학교 운영과 비리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첫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전교조 설립에 주도적이었던 그는 1천500여명의 대량 해고사태를 피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교편을 잡은 것은 1994년 3월, 해직된 지 4년 6개월 만이었다. 해직교사로 교육민주화를 외치며 현실적 어려움을 겪던 그가 교단에 다시 서게 된 것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있는 혁신학교를 선사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 400년 된 느티나무를 벗 삼았던 석천리 꿈많은 소년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당선인(58)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던 산 중턱 산골마을이었다. 천안에 가려면 3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야 하는 ‘산골 소년’이었다.
사찰과 사당 등을 짓는 대목(大木)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에서 살던 그는 궁핍한 산골에서 벗어나 강원도 철암 공장으로 향하던 부모님의 손을 떠나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그의 고향 입구에는 400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어른 양팔로 세 번을 둘러야 할 정도로 큰 나무는 그에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곳이었다가, 미래의 꿈과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우는 희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봄이면 산에 올라 친구들과 함께 진달래를 따 먹고, 달래와 냉이, 다래, 으름, 머루, 칡뿌리로 간식을 대신했지만, 조부모가 아낌없이 준 사랑 덕에 삶에 가장 큰 자양분을 얻었다.
■ 부모님에게 교사의 덕목을 배우다
10년 만에 함께 살게 된 부모님은 한없이 자애롭던 조부모와 달리 그를 엄격하게 대했다. 어리광만 부리며 살았던 철부지에게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될까 우려돼 회초리로 매섭게 야단을 치곤 했다. 반면 아버지는 교육문제는 어머니에게 일임하고 그를 묵묵히 바라보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 어머니의 엄격함, 아버지의 신뢰는 그가 교사로서 살아가는 내내 가슴에 간직한 덕목이 됐다.
80년대 초반 민주화 요구 집회와 시위 속에도 대학생활 낭만에 빠져 베이스기타를 잡았던 그는 시골훈장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자신에게 가르쳐주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전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스승의 보람을 느끼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교직을 이수해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 첫 부임 학교서 사학재단 비리에 맞서다
1985년 2월, 대학 졸업 한 달 뒤 사립학교인 인천 성헌고 교사로 부임했던 그는 재단 이사장 부인이 교장으로 있던 이곳에서 처음 사학재단 비리와 맞섰다. 1987년 새로운 학교재단이 들어선 뒤 부족한 교사를 임시 강사 채용으로 대체하는 등 이상한 일이 이어졌다.
결국 그는 동료교사 8명과 함께 1988년 1월 유성으로 떠난 여행에서 처음 서로 문제에 공감하고 공동 기구를 만들기로 했다. 1988년 8월 23일 하나 둘 뜻을 함께했던 교사 23명이 평교사협의회를 공식 발족했고, 그는 초대 회장이 됐다. 첫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이후 작은 사건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결국 그는 교사협의회 결성을 사유로 해임됐고, 청문회를 통해 교사 임용 비리 등 학교 전횡이 폭로되고, 교사와 학생, 학부모 100여명이 학교로 몰려오면서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 4년 6개월, 해직교사의 삶이 시작되다
성헌고 민주화 투쟁이 마무리될 무렵 전국 교사협의회가 교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전교조 결성이 본격추진됐다. 그 역시 전교조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89년 6월 10일 전교조 인천지부도 800여명의 교사들과 함께 결성식을 열고 정식 출범했다. 그는 학교민주화를 주도하고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89년 8월 1일자로 직권면직 조치됐다. 1천500여명의 대량해고 사태에 항의하며 전국 해직교사들과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고교 동창 5명을 만났다. 부평고 출신 해직교사만 6명, 힘든 단식에도 그가 교육민주화를 포기하지 않도록 한 힘이었다. 4년 6개월 해직교사 시절, 그의 부인 김인숙씨는 묵묵히 남편 곁을 지키며 가정을 책임졌다. 명절에도 빈 손으로 고향집을 찾아야 했고, 어머니 생신에는 빈손으로 갔다가 아들의 어려움이 마음 쓰여 사준 점퍼를 입고 돌아오며 그는 참 많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 다시 돌아온 학교, 멈출 수 없었던 교육민주화
1992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해직교사들의 원상복귀에 매달린 그는 1994년 3월 신규 특별채용 형식으로 관교중학교에 부임했다. 여전히 전교조는 불법이었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야말로 평생을 해볼 만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원하는 내용의 복직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였다.
전국 최초 여자공업고등학교인 인천여자 공고에서 일하던 1999년, 드디어 전교조는 합법노조가 됐다. 1년 6개월여를 전임자인 사무처장으로 일하던 그는 2001년 다시 교사로 복직했다. 그리고 2002년, 인천지부장선거에서 11대 인천지부장에 당선됐다. 이후 12대 지부장까지 연임하며 교육개방, 교육행정정보시스템(네이스) 도입, 학교급식 지원조례 등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면 언제나 제일 앞에 그가 있었다.
■ 행복한 교육 만들기에 나서다
부개고등학교에 부임한 그는 인천 참교육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반찬가게, 정육점, 국수집을 운영하는 각계각층 시민 400여명이 참여해 십시일반 장학금을 모았다. 그리고 옮겨간 동인천고에서는 인문계 고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고민했다. 인문계 고교를 활력이 넘치는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2016년 행복배움학교(인천형 혁신학교)인 동암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교 혁신을 이끌었다. 동암중은 모두가 주인이었고, 소통에 두려움 없는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곳이었으며, 학부모와 학생 모두 학교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곳이었다. 욕설, 체벌, 꾸중 대신 칭찬과 웃음이 가득했던 동암중은 그에게 ‘2017 대한민국 참봉사대상’ 참교육공헌부문 대상,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교육부문 대상을 안겼다.
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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